내가 보는 세상

[중앙일보] 가을 꽃

FERRIMAN 2008. 10. 17. 09:01

기사 입력시간 : 2008-10-16 오후 3:25:47
[혁이 삼촌의 꽃따라기] 작은 꽃 큰 기쁨
하늘은 비어 가는데 그 아래 세상은 색으로 가득하다. 소멸의 계절인 가을에, 피고 지는 꽃들과 숨을 주고받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사람도 가끔은 ‘마음의 광합성’이 필요하다. 온몸으로 햇볕을 받을 수 있는 요즘이 그러기에 딱 좋은 때다.

이즈음에는 뭐니 뭐니 해도 구절초 향기가 최고다. 꽃은 흰색에서 분홍색까지 다양하게 핀다. 노란색 꽃으로는 감국과 산국이 있다. 주로 바닷가 쪽에서 보이는 감국은 꽃이 크고 잎이 두꺼우며, 산지 쪽에서 보이는 산국은 꽃이 작고 잎이 얇다. 향기가 진한 산국은 주로 약으로 쓰고, 차로 마실 때에는 감국을 쓴다. 바닷가 절벽에는 해국이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크고 화려한 꽃이 피는 꽃향유는 잎에서 특유의 박하 향기가 난다. 운이 좋으면 흰색의 흰꽃향유나 잎이 가느다란 가는잎향유도 만날 수 있다. 귀여운 늘씬녀 솔체꽃도 가을 들녘의 한 자리를 보랏빛으로 물들인다. 투구꽃 계열은 더욱 진한 보라색 투구를 쓰고 꽃들의 전쟁터로 나간다.

돌나물과의 식물들 중에는 절벽 위에 피는 둥근잎꿩의비름이 제일이다. 같은 과 식물 중에서 바위솔 가문은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오래된 사찰의 기와지붕 위에서 자라 와송(瓦松)이라고도 불리는 바위솔은 살아가는 일 자체가 신기하다. 바위솔 형제들의 꽃은 대개 ‘남성’을 닮은 듯한 기다란 꽃을 피운다.



용담과의 쓴풀이 개쓴풀과 쓴맛을 경쟁하기도 한다. 쓴풀은 주로 남부지방에서 보이고, 개쓴풀은 중부지방에서만 흔하므로 실제로 두 꽃이 마주칠 일은 별로 없다. 꽃이 자주색을 띠는 자주쓴풀의 아름다움이 그중 제일이지 싶은데, 흰색의 ‘흰’자주쓴풀이 발견되어 최초 명명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강원지방은 이미 색채마술사가 다녀갔다. 설악산 권금성의 케이블카 아래로 보이는 산은 붉을 대로 붉어졌다. 억새 흔들리는 민둥산, 곱게 물드는 소백산에 오르면 발길을 돌리기 아쉽다. 중부지방의 이름도 시원한 청량산에 가서 좀바위솔을 들여다보거나, 샛노란 은행나무를 보러 용문산에 가는 것도 좋겠다. 경기도 서운산에 가면 노란 비목나무 단풍과 보라색 꽃향유가 기다린다. 주왕산 절벽 위의 둥근잎꿩의비름은 사람의 손길을 멀리한다.

남부지방의 내장산 단풍터널 아름다운 거야 세상이 다 안다. 이맘때면 케이블카 아래 우화정 물속에 폭 빠지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지리산은 성삼재로 올라가 노고단을 거쳐 피아골로 내려오는 길이 으뜸이다.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신불산 일대는 수십 만 평의 억새평원으로 장관을 이룬다.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 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해서 죽림굴 가는 방면으로 가면 승용차로도 얼마든지 간월재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 주변에는 여러 귀한 꽃들이 억새숲에 몸을 낮추고 있다.

산이 힘든 사람이라면 바닷가 해국을 보면 된다. 지난해 기름유출 사고로 큰 피해를 보았던 의항리와 만리포를 가 보시라. 끄떡없이 꽃피워준 해국의 모습이 대견하고 아름답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지만 가을은 너무 색(色)스럽다.

글·사진=이동혁 http://blog.naver.com/freebow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