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람들은 서양에서 인기가 높았던 중국 도자기 제조 기술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수백 년을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1709년에 독일의 작센 지방에서 처음으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달랐던 세 사람의 ‘협력’에 의한 응용화학 연구 덕분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는 연금술사였다. 물론 당시에는 연금술과 화학이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귀중한 유물
상인들은 육로를 통해서 중국 도자기를 유럽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당시 마르코 폴로와 같은 여행자들은 도자기 제조 기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틴구이라는 도시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컵이나 사발과 접시들이 생산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우선 광산에서 특별한 종류의 흙을 캐내서 높이 쌓아두고 30~40년 동안 절대 건드리지 않고 바람과 비와 햇빛으로 숙성시킨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흙이 정화되어서 앞에서 이야기한 그릇을 만들기에 적당하게 된다. 적당한 색깔을 입힌 후에 가마나 화로에서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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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F. 뵈트거로 추정되는 초상화. 화가 미상. 바바리아 국립 박물관 소장. |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요업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지만, 중국 도자기를 흉내 내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 도자기의 하얀 색깔, 단단함, 또는 반투명함 중에서 어느 한 가지 특성만 가지고 있어도 귀중하게 여겨졌다. 중국 도자기의 모든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는 제품은 만들 수가 없었던 17세기 유럽 상인들은 동인도와의 무역을 통해서 아시아의 그릇을 들여와서 도자기에 대한 열풍을 일으켰다.
3년을 기다리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무늬를 넣은 훌륭한 도자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스웨덴에는 중국의 도공이 유럽 디자이너의 지시 사항을 무늬라고 착각을 해서 도자기에 고색창연한 코발트색으로 그 지시 사항을 새겨 넣은 접시가 남아있다.
적당한 물질
도자기는 세라믹 제품이다. 옛날에는 세라믹 제품을 무기물로 만들어서, 내화성이 있고, 동공이 많고, 잘 깨어지고, 단열 특성을 가진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기도 했지만, 그런 정의는 모든 면에서 애매한 것이었다. 세라믹 교과서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세라믹을 정확하게 정의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세라믹은 절연성이 뛰어나다는 정의는 세라믹 초전도체에 맞지 않고, 잘 깨어지는 특성도 세라믹으로 만든 터빈 날개에는 적당하지 않다. 도대체 정확한 정의가 필요할까? 열역학처럼 훌륭한 과학의 경우에는 그런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세상이 깨끗하고 잘 정리되어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될 뿐이다. 세상은 절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이 아니더라도 열을 이용해서 변환시킨다는 사실이 세라믹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자기 가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물리적 변화는 매우 복잡하다. 도자기는 고온으로 구운 세라믹으로, 애매하기는 하지만 흰색과 단단함과 두드리면 울림이 생기는 공명 특성으로 알아볼 수가 있다. 중국 도자기라고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용천 청자, 경덕진 자기, 덕화요 자기를 비롯해서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도자기의 성분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령토라고 부르는 곱고 하얀 진흙은 꼭 필요하다.
거기에 다른 물질들이 더해진다. 중국 사람들은 백돈자라고 부르는 운모의 일종인 견운모라는 광물을 넣었고, 뵈트거 공방에서는 설화석고를 넣었다. 고령토의 주성분은 Al2O3․2SiO2․2H2O로 표현되는 수화 규산 알루미늄이 층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카올리나이트이다. 고령토를 가열하면 물이 빠져나간 후에 일부 실리카는 고온에서 안정한 크리스토발라이트로 바뀐다. 나머지 규산 알루미늄은 3Al2O3․2SiO2라는 물라이트가 된다. 도자기의 독특한 특징은 바늘처럼 생긴 물라이트 결정들이 유리질의 실리카에 의해서 고정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환의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복잡성 또는 우리의 완전하지 못한 이해가 훌륭한 중국 도자기는 비롯해서 흔히 사용하는 세면기의 경우에도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연금술의 불길
유럽의 도자기 개발에 기여했던 세 사람 중에서 중국 도자기에 가장 먼저 반했던 사람은 작센의 선거후이면서 폴란드의 왕이었던 강력왕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의 신하였던 취른하우스의 에렌프리트 발터라는 귀족적인 자연철학자이면서 실용적인 박식가였다. 수학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부드러운 진흙을 이용해서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거대한 집열 렌즈를 만들어서 당시로는 가장 높은 온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는 연금술과 화학이 근원적인 변환의 법칙이라는 철학을 추종했던 점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젊은 연금술사였다. 그는 충분한 경험을 가진 훌륭한 화학자로 야금 기술과 제약 기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연금술사는 상당한 정치적 기술이 필요한 위험스러운 직업이었다. 후원을 받으려면 금을 만들거나 병을 고치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후원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려면 끊임없이 창의적인 핑계를 찾아내는 상당히 정교한 기술을 발휘해야만 했다. 언제나 더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해주면서,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어야만 했다. 연금술사들이 언제나 자리를 옮겨 다녔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연금술사가 성공을 하게 되면 후원자는 당연히 그 기술을 이용해서 많은 재산을 모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황금알을 낳은 거위 이야기처럼 아우구스투스는 뵈트거를 작센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에 연금시켜 버렸다. 금을 만들지 못했던 것에 대한 벌이기도 했고, 만약에 뵈트거가 성공하게 되면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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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금을 만들어내겠다고 거짓말을 했던 연금술사를 교수형에 처했다는 발표문(1709). 뮌헨의 독일박물관 소장. (오른쪽) 강력왕 아우구스투스. 뵈트거의 붉은 석기(1714년 경) |
아우구스투스가 불쾌하게 느꼈던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연금술사였던 도미니코 에마누엘 카에타노 백작이 자신의 거짓이 폭로된 후에 겪었던 일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문서도 남아있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져 버렸다. 뵈트거가 붉은 석기에 애를 써서 새겨 넣었던 초상화에 나타난 아우구스투스의 풍채를 보면 왜 사람들이 그를 ‘강력왕’이라고 불렀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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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J. 켄들러가 1740년대에 제작한 마이센 도자기. 두 사람의 석공들 이 살펴보고 있는 구(球)가 특징. &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를 모방한 마이센 도자기. |
취른하우스는 뵈트거에게 도자기라는 ‘백색 금’을 만드는 일을 맡기도록 아우구스투스 왕을 설득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써도 실패했던 일이었지만, 뵈트거는 재료와 사람들의 교묘한 결합 덕분에 2년 만에 그 임무를 완수해버렸다.
우선 근처에 취른하우스가 알고 있었던 고령토 광산이 있었다. 그러나 작센의 진흙에는 중국의 도예공들이 훌륭한 곡선미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유연한 진흙에 필요한 미량의 알칼리성 운모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진흙이 도자기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뵈트거는 꼭 필요한 고온에 이를 수 있는 ‘지옥의 불’을 피울 수 있는 가마를 만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의 드레스덴 왕궁에서 일하던 예술가들 중에는 도자기를 장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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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들이 흉내 내려던 것과 같은 고려청자 | 그러나 성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연금술사에서 화학공학자로 변신한 뵈트거의 세심한 실험이었다. 1708년에 사망했던 취른하우스의 도움으로 일에 착수했던 뵈트거는 27세였던 1709년에 처음으로 진정한 백색의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1710년에는 도자기 공장을 15마일 남쪽의 엘베 강변에 있는 도시 마이센으로 옮겼기 때문에 마이센 도자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1713년에는 벌써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반암과 붕사의 결정
뵈트거의 도자기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는 1998년에 발간되었던 자넷 글리슨의 ‘아르카넘’이라는 책에 잘 소개되어 있다. 그 책에는 뵈트거가 1709년 말에 아우구스투스에게 썼던 다음과 같은 감성적인 시가 소개되어 있다.
폐하께서는 미숙한 제가 아직도 만들어드리지 못한 황금 과일을 간절히 바라시겠지요. 그 대신에 폐하께 반암과 붕사의 결정을 받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손이 도자기 그릇의 심장까지 닿았습니다. 여기 두 가지 모두를 드리겠습니다.
그 내용은 사실이었다. 뵈트거는 연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시를 보면 그가 연금술사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위대한 발명품이 된 투명한 ‘백색 금’을 만드는 일에 안주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도자기가 결국은 왕의 보석 상자를 가득 채워주었지만, 그런 도자기를 팔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에도 아우구스투스는 금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뵈트거는 연금되어 있어야만 했다. 끊임없이 금을 만들도록 강요받았던 그는 1713년에서야 ‘성공적인’ 변환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마침내 뵈트거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병들고 탈진한 상태였다. 그는 마이센 이외의 지방에서도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졌던 1719년에 사망해버렸다. 당시에도 산업적인 비밀을 감춰두는 일은 쉽지 않았다.
쉬미스트리(Chymistry)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연금술사가 필요했을까? 당시의 화학자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런 의문은 연금술과 화학이 구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내 생각에 뵈트거 시대에는 그런 구별이 불가능했다. 야금을 하거나, 약품이나 화장품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천을 염색할 때처럼 화학자가 존재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물질을 변환시켰었다. 나는 그런 변환을 ‘원시화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그런 훌륭한 원시화학이 바로 현대 화학에 이르는 여러 가지 실마리 중의 하나였다고 믿는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화학적 변환을 변환에 대한 철학의 상징 또는 로고로 여겼던 독특한 문화적 실험이었던 연금술도 그런 실마리 중의 하나였다. 왜 하필이면 화학이었을까? 당시에는 화학적 변환이 익숙하면서도 눈부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피어오르는 불꽃이나 광석을 제련하는 과정을 상상해보면 된다. 밝은 색을 가진 인디고 염료 통이 발효된 소변에 의해서 환원되어서 탁한 액체가 되었다가 공기에 노출되면서 영광의 푸른 빛으로 되살아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결국 변환의 철학이었던 연금술은 화학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렸다. 연금술사는 화학자가 되었다. 당시의 원시 화학과 연금술의 엄격한 구분은 짧은 삶을 살았던 뵈트거에 의해서 멋있게 보인 것처럼 모든 것이 뒤섞여 있던 당시의 세상을 오늘날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인디애나 대학교의 역사학자 윌리엄 R. 뉴먼과 로렌스 M. 프린시피는 ‘쉬미스트리(chymistry)’라는 새로운 표현이 당시의 연금술과 화학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런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나도 한 마디를 더하고 싶다. 백보를 양보해서 뵈트거가 자신의 비결을 아주 자세하게 적어두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연금술적인 영감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인지 궁금하다. 누구나 석기나 유리그릇을 만들어서 일상생활에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훌륭한 송이나 고려청자를 손에 들고 돌려가면서 표면에 만들어진 미세한 금들을 살펴보게 되면 도자기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도자기는 정말 장엄한 것이다. 단순한 진흙을 다른 어떤 자기와도 다르게 눈을 사로잡고 소유하고 싶어하도록 만드는 정교한 물건으로 만들겠다는 영감은 단순한 실험 기술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도자기를 ‘합성’하는 것은 변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자연을 개선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장엄한 응용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사가 필요했고, 박식한 지식을 가진 자연학자 취른하우스와 강력왕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있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제발 오늘날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들이 여기서 무엇인가를 배우지 말기를 바란다.)
변환
미르세아 일리아드는 1956년에 발간된 ‘대장간과 도가니’에서 야금, 연금술, 종교 사이의 관계를 추적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실험 과학의 성공 때문에 연금술의 꿈과 희망을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그와는 반대로, 19세기 전체를 압도해왔던 실험과학과 산업화의 발전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 무한한 발전에 대한 미신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사상은 극단적인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넘는 연금술사의 꿈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연금술사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자연을 개선하고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의무라는 19세기의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리아드는 연금술사의 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 사회가 그런 꿈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변환 능력을 너무 믿고 자랑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나는 우리의 현실을 미르세아 일리아드만큼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화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금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늘 높이 외치고 있기는 하지만 병든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고, 유기 합성의 원료인 진흙을 제약회사들이 팔고 있는 금으로 변환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호프만 칼럼은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코넬대학교의 프랭크 로즈 인문학 석좌 교수인 로알드 호프만 교수가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에 게재했던 글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