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세라믹,그리고 Ferrite
[사이언스타임즈] 조선의 연금술사(상)
FERRIMAN
2010. 4. 8.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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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 은(銀) 만든 조선의 연금술사 (상) 이야기 과학 실록 (86) 2010년 04월 08일(목)
이야기과학실록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연금술사는 주인공 산티아고와 헤어지기 직전에 그동안 감추었던 능력을 발휘한다. 납으로 금을 만들어 일행 각자의 몫으로 나누어주는 대목이 바로 그것.
이와 같은 연금술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오는 꿈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이었다. 금은 물에 담가 놓거나 땅에 묻어 놓아도, 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금을 가장 완벽한 금속으로 여겼으며, 다른 금속들도 모두 최고의 완벽한 단계인 금으로 변화하려는 속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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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술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오는 꿈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이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모든 물질이 물·공기·흙·불로 이루어졌다는 엠페토클레스의 생각을 발전시켜 4원소설을 확립했다. 이에 의하면 금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물질은 4원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각 물질은 그 원소들의 존재 비율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 배합을 결정하는 것은 천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불멸의 물질인 제5원소 에테르라고 보았다.
때문에 많은 연금술사들은 에테르를 찾아내기만 하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금속인 금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즉, 그들에게 에테르는 연금술의 비밀 열쇠인 ‘현자의 돌’이었던 셈이었다.
납이나 철, 수은 등 흔한 금속으로 가장 완벽한 금속인 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서양 연금술이 추구한 목표라면, 중국의 연금술은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 되기 위한 도교의 연단술로 발전했다. 기원전 3~4세기부터 시작된 중국 연단술의 기초가 되는 이론은 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사상가였던 추연이 제창한 음양오행설이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사물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라는 다섯 가지 원소로 이루어지며, 음과 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배합되는 것으로 보았다. 중국 연단술의 경우 물질적인 이익보다는 정신적 수련을 중시하며, 영생을 할 수 있는 단약이나 금단이 바로 서양 연금술의 ‘현자의 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현자의 돌'을 찾아라
그런데 조선시대 때도 중국 연금술이 아니라 서양의 연금술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로부터 금은을 만들 수 있다고 자처한 연금술사들이 있었다.
1437년(세종 19) 7월 6일자의 세종실록을 보면 중국에서 온 김새라는 인물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새는 여진족에게 포로로 잡혀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그 무렵 조선으로 도망쳐온 인물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금은을 제련하여 주홍색의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모자 위에 부착하는 연잎 모양의 파란 장식물) 따위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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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은의 정련법을 조선에서 배워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온갖 기술이 뛰어나며 정교하다고 알려진 김새는 또한 ‘돌멩이를 제련하여 금과 은을 만들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해마다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 금은이 모자라 세종이 중국에 사람을 보내 금은을 채취, 제련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는 등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세종은 김새에게 기생을 아내로 삼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는 한편 당시 조선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배우게 했다.
하지만 김새는 장영실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가르쳐줄 기술이 애초부터 없었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인 듯싶다. 김새는 주변에서 구해다 준 돌멩이들이 모두 진짜 돌이 아니라는 트집을 잡으며 금과 은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돌멩이 중에서 김새는 결국 ‘현자의 돌’을 찾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또한 금은을 제련하여 주홍색의 가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 만드는 법을 장영실에게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김새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무사히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진족의 포로였던 중국인이 도망쳐오면 중국으로 다시 보내주는 것이 그 당시의 외교관례였기 때문이다.
납으로 은을 만들어 보이다
연산군 때는 김새 같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연금술사가 등장했다. 1503년(연산군 9년) 5월 18일자의 연산군일기를 보면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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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광석에는 은뿐만이 아니라 다량의 납도 포함되어 있다. |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 종 김검동이 연철(鉛鐵)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 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시험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당시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조정을 장악한 후 패륜적인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하던 폭군이었다. 이런 연산군 앞에서 한낱 양민과 노비 따위가 거짓을 아뢰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감불과 김검동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들은 연산군 앞에서 실제로 납으로써 은을 만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까닭일까. 그들이 시험해 보인 것은 납으로 은을 뚝딱 만들어내는 연금술이 아니라 납광석에서 은을 효율적으로 분리 추출하는 새로운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었다.
은은 금과 함께 오래 전부터 귀금속 대우를 받아왔지만, 지금처럼 통용되기 전까지는 많은 제약 사항이 따랐다. 먼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은은 자연 상태의 금보다 그 양이 훨씬 적었다. 따라서 다른 금속과 뒤섞인 광석으로부터 순도 높은 은을 뽑아내야 하는데, 그 정련 과정이 다른 금속들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김감불과 김검동이 새롭게 개발한 연은분리법은 함경도 단천에서 많이 채굴되는 납광석으로부터 순수한 은을 제련해내는 방식이었다. 원래 광산에서 채굴되는 은광석에는 은뿐만이 아니라 다량의 납도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이 새로운 은 제련법을 일컬어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라 했다.
단천연은법의 방식은 연산군일기에 잠깐 언급된 것처럼 먼저 무쇠 화로 안에 매운 재를 바른 다음 납광석 덩어리를 채운다. 그리고 화로 전체를 질그릇 조각들로 덮고 그 위아래를 강한 숯불로 달구면 납이 먼저 녹아 아래로 내려간다.
계속 센 불로 열을 가하면 마침내 은도 천천히 녹는데, 그러다 갑자기 표면이 갈라지며 은만 위로 모이고 납은 재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때 물을 뿌리면 은이 응고되면서 납과 분리되고, 다시 재 속으로 스며든 납에 열을 가하면 재를 없애고 납도 분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천연은법은 은과 납의 녹는점·끓는점의 차이와 녹아 있는 상태의 비중 분리를 이용한 건식제련법의 일종이었다. 이들이 개발한 단천연은법 덕분에 질 높은 은 광석이 많이 채굴되던 함경도 단천은 조선 제일의 은 산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최고 기술이던 '단천연은법'
단천연은법은 당시 유럽이나 중국보다 뛰어난 방식으로서,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훌륭한 은 제련 기술이었다. 1637년에 간행된 명나라의 학자 송응성이 저술한 ‘천공개물’이란 책에 단천연은법과 거의 비슷한 은 제련법이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술이 중국으로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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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은 정련 과정이 다른 금속에 비해 까다롭다. | 일본 또한 단천연은법을 몰래 수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일본학자에 의하면 일본은 17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0% 정도를 생산하게 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이는 16세기 중엽 조선이 지니고 있던 은 제련기술을 몰래 수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6세기 중엽이라면 바로 김감불과 김검동이 단천연은법을 개발한 이후이다.
또 연산군에 이어 즉위한 중종 때 어숙권이란 학자가 저술한 ‘패관잡기’에 따르면 ‘왜인들은 처음에 납으로 은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연철만 가지고 왔는데, 중종 말년에 어떤 은장이가 몰래 왜인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어 이때부터 왜인이 은을 많이 가지고 왔으므로 서울의 은값이 폭락하고 말았다’는 내용의 기록도 있다.
이렇게 볼 때 그 비밀 기술은 단천연은법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정작 조선에서는 그 후로 단천연은법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조선 헌종 때의 실학자 이규경이 1834년에 저술한 과학기술서인 ‘오주서종박물고변’에 단천연은법과 비슷한 은 제련법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기록도 중국의 송응성이 지은 ‘천공개물’을 통해 역으로 다시 이규경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사회에서는 아무리 획기적인 기술이라 해도 그저 천한 노비나 하는 잡스런 일로밖에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연금술이 더 성행하고 발달했던 그 당시 서양에서는 과연 어떤 성과를 올리고 있었을까? (계속) |
저작권자 2010.04.08 ⓒ ScienceTim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