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사이언스 타임즈] 이공계 전공자의 글쓰기
FERRIMAN
2010. 8. 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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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전공자에게 글쓰기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 2010년 08월 19일(목)
S&T FOCUS 세상은 항상 일등만 기억한다.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엘리샤 그레이는 그레이엄 벨과 거의 동시에 전화를 만들었지만, 세상은 전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벨의 이름만 기억한다. 벨이 몇 시간 먼저 특허를 출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동설의 경우 이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지동설과 함께 떠올리는 이름은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 한 세기 뒤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이 세상과 접한 방법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모두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출판했지만, 그 책의 성격은 확연히 달랐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는 변혁적인 생각을 담았지만 라틴어로 쓴 논문 형식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다가가기 힘들었다.
반면 갈릴레이가 1632년에 펴낸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이하 천문 대화)’는 세 명의 주인공이 지구와 행성의 움직임을 토론하는 대화 방식으로 되어 있어 한결 접근이 쉬웠다. 또한 라틴어로 썼던 당시 대부분의 학술서적과 달리 시민들의 일상 언어였던 이탈리아어로 기술됐다. 따라서 ‘천문 대화’는 지동설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갈릴레이를 지동설과 함께 기억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글쓰기에 관한 두 가지 오해
갈릴레이의 ‘천문 대화’ 이후 진화론을 다룬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환경문제를 각인시킨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동물행동학 이론을 사람에게 적용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까지 많은 훌륭한 과학책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과학 분야의 글쓰기는 ‘대단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과학 글쓰기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분야의 대가여야만, 혹은 세상에 무언가 파장을 던질만한 이론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작가였던 찰스 스노는 1959년 ‘두 문화와 과학혁명’을 통해 현대 사회는 유독 인문학과 과학이 심각하게 대립하는 시기라고 바라봤다. 또한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반목과 적대감을 일으켜 양쪽 모두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인문계와 이공계 사이에 놓인 높은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필자의 경우 책을 한 권 낼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받는 질문이 있다. 바로 “이공계 전공자가 어떻게 글을 쓸 생각을 했습니까”이다. 과학을 전공했으면 연구실에서 기계나 약품과 씨름하는 모습이 어울리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건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게 이유일 것이다.
이런 시각은 이공계 전공자 스스로도 갖는 선입견이다. 과학책을 쓰는 것은 특수한 경우일 뿐 본인과는 관련 없는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공계 출신들이 갖는 커다란 오해 중 하나가 글쓰기는 이공계 전공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다.
이공계 전공자가 갖는 글쓰기에 관한 또 다른 착각은 과학자에게 글쓰기란 대중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라고 보는 시각이다. 과학의 발달이 빨라지면서 과학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고, 이에 일부 과학자는 과학 지식에서 소외된 대중에게 과학의 경이로움을 맛보게 해준다는 생각으로 대중과학서를 쓰기도 했다. 만약 이런 대중과학서가 과학자가 쓰는 글의 전부라고 좁게 바라볼 경우 글쓰기는 곧 서비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이란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일지 몰라도 대개는 귀찮은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꼭 필요한 기술
여전히 많은 사람은 과학자 하면 ‘연구실에 틀어박힌 은둔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겠지만, 과학자가 그런 골방에서 나온 지는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이공계 전공자가 글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꼭 필요한 일이다. 수치를 읽거나 현미경을 다루는 법이 과학자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인 것처럼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기술인 것이다. 또한 글쓰기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일이다.
이공계 글쓰기가 왜 자신을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일까. 이는 점점 거대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된 현대 과학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현대 과학은 엄청난 물질과 자원, 인력이 요구되는 ‘빅 사이언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라도 혼자서 로켓을 만들고 인간 게놈을 조사할 수 없다. 다른 연구자와의 협력은 필수이며, 연구에 필요한 비용, 연구가 가능한 제도를 사회가 마련해 주지 않는다면 과학자 개인의 힘으로는 제대로 된 연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타인과 어떤 식으로든 협력을 맺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그 중 핵심은 ‘글’이다. 사회적 계약은 허공에 흩어지는 말보다 문서화된 글을 선호한다. 그리고 이 커뮤니케이션 관계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한 자원을 얻어야 하는 쪽은 과학자 자신이다. 무지한 대중을 깨우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한 설득의 일환으로 글쓰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공계 글쓰기는 곧 연습이다
이처럼 글쓰기는 이공계든, 인문계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이에게 필요한 기술이다. 하지만 이공계 전공자에게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 먼저 겁부터 먹기 일쑤다. 스스로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다 멋들어진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반드시 가수 같은 가창력을 갖출 필요는 없다. 그저 흥겨운 분위기에 어울리면서 자신의 음역에 맞는 노래를 고르는 센스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공계 글쓰기 역시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학성까지 따라할 필요는 없다. 이공계 전공자가 써야 하는 글, 가령 연구계획서나 논문, 보고서, 배경자료 등을 다른 사람이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쓰면 충분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공계 전공자에게 이미 글쓰기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 있다는 점이다. 글은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일이므로 논리적 구성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공계 출신은 합리성을 중시하는 과학을 전공하면서 논리적 사고력을 이미 체득하고 있다. 따라서 이공계 전공자에게 요구되는 글쓰기는 문학적 감수성보다는 특정 패턴에 대한 반복이 더 중요하다. 이미 갖춰진 논리적 사고력에 패턴 숙지와 꾸준한 연습만 뒷받침되면 글쓰기는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공계 전공자를 위한 맞춤식 글쓰기 과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을 비롯해 한국연구개발인력교육원(KIRD), 전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T) 등에서는 이공계 전공자를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공계 글쓰기의 중요성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이 같은 활동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다. 최근의 변화가 반갑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글쓰기란 인문계 전공자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따라서 이공계 전공자에게 글쓰기는 꼭 필요한 기술이라는 인식이 앞으로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와 대중뿐만 아니라, 바로 이공계 전공자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다. |
제공: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기반과 |
글: 이은희(과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2010.08.19 ⓒ ScienceTim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