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활동
[중앙일보] 열차여행- 환상선 눈꽃열차
FERRIMAN
2013. 1. 25. 22:54
제천~추전~풍기 한바퀴 돌아 환상선 … 눈이 황홀해서 환상선
[커버스토리] 환상선 눈꽃열차

환상선 눈꽃열차(이하 환상열차)는 해마다 12월 말에서 2월까지 운행하는 임시 관광열차다.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출발해 제천역(충북 제천)~추전역(강원 태백)~승부역(경북 봉화)~풍기역(경북 풍기)을 거쳐 다시 제천역을 통해 서울로 돌아온다. 고리 형태의 순환열차라 해서 ‘고리 環(환)’에 ‘모양 狀(상)’을 쓴다. 정차역에 머무는 3시간 남짓을 제외하면 11시간 가까이 기차에 갇혀 있다.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다. 자동차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중부 산간지방의 눈꽃 그윽한 정취를 따뜻한 기차 안에서 만끽할 수 있어서다. 환상적인 설경이 펼쳐져 ‘환상열차’라는 주장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싸락눈 날리던 지난 12일 올해 첫 환상열차에 올랐다.

눈 덮인 철길의 드라마
오전 7시3분. 환상열차가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이어 청량리·덕소·양평역에서 예약 승객을 마저 태우자 72석짜리 6량 열차가 만석이 됐다. 주말이라 가족과 연인 승객이 적지 않았다.
열차는 제법 속도가 빨랐다. 청량리에서 제천까지 이어지는 중앙선 구간은 시속 140㎞로 질주했다. 출발한 지 1시간30분쯤 지났을까, 오른쪽 차창 밖으로 섬강을 따라 굽이치는 제방 길이 보였다. 4년쯤 전 직선화되기 전의 중앙선 열차가 지나던 길이다. 새로 터널을 뚫고 쭉 뻗은 새 선로를 내면서 중앙선 열차는 빨라졌다. 그만큼 느긋함도 잃었다. 서원주역을 지나며 두 해 전 옛 중앙선과 함께한 71년의 역사를 마감한 간현역을 추억했다. 폐역된 간현역 건물은 서원주역 북쪽 1.5km 지점에 남아있다고 한다.
원주역을 통과하자 산세가 깊어졌다. 차창 밖 풍경에서 강원도 두메산골다운 정취가 느껴졌다. 열차는 자동차로는 엄두도 못 낼 만한 심산유곡을 자유자재로 헤집으며 달렸다. 차창마다 아득한 설경이 그림처럼 담겼다.
오전 9시 15분경 열차는 터널 세 개와 긴 철교를 건너 금대2터널로 들어섰다. 똬리를 틀듯 산봉우리를 감아 오르는 1974m의 ‘루프형(Loop)’ 터널이다. 산 아래와 위에 터널 입구와 출구가 일직선으로 놓여 있어 터널에 들어갈 때 열차 오른쪽에 보였던 대형 모텔이 터널을 나와서도 오른쪽 창밖에서 보였다.
제천역에서부터 열차는 늑장을 부렸다. 제천역에서 백산역을 잇는 태백선은 중앙선과 달리 구불구불 느린 옛 철길의 맛이 있었다. 오전 11시 25분 인적 드문 강원도 정선 탄광촌을 지난 열차는 함백산 북부를 관통하는 정암터널로 접어들었다. 길이 4505m로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긴 터널이다. 객실은 7분이 넘도록 암흑에 잠겼다. 이윽고 환상열차의 첫 번째 정차역 추전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추전역, 깊은 승부역
오전 11시35분 추전역에 내렸다.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기차역이다. 해발 855m에 있다. 연중 난로를 피워야 할 만큼 기온이 낮다. 석탄이 모이고 수송하는 터여서 탄가루 섞인 잿빛 눈이 선로에 쌓여 바람결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다시 열차가 움직였다. 낙동강과 선로가 엇갈리고 간이역이 어우러지길 한 시간여, 12시40분 열차가 승부역에 멈춰 섰다. 1시간40분 뒤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승부역에서는 기차가 멈추기 전에 가장 앞쪽 객차에 가서 문이 열리자마자 냅다 뛰어야 한다. 봉화 승부마을 주민들이 차린 임시 천막촌에서 점심을 사먹어야 하는데, 400명 넘는 승객이 일제히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관광열차가 잇따라 정차하는 날은 음식이 똑 떨어지는 불상사도 벌어진다고 한다.
천막마다 메뉴는 비슷비슷했다. 손두부·육개장·우거지국밥·곤드레밥 등으로 가격은 5000~6000원이었다. 산이 키운 것을 집에서 손수 삶고 버무려 낸 건강한 맛이었다. 우거지국밥을 파는 고금련(80) 할머니가 “새벽 6시부터 바리바리 준비했다”며 주름진 웃음을 지었다.
꽁꽁 얼어 눈이 덮인 비룡계곡을 따라 눈 발자국을 냈다. 아무 기슭에나 비닐을 깔고 미끄러져 내리면 바로 눈썰매장이 됐다. 철길과 나란히 흐르는 낙동강도 단단히 얼어 얼음썰매 타기가 한창이었다. 전부 무료였다. 걱정거리는 눈밭에 묻고 모처럼 동심을 만끽했다.
맛있는 풍기, 다시 서울로
나른한 오후 2시40분. 카페 칸에서는 포크송 가수의 라이브 공연이 열렸다. 1970년대 흘러간 히트송이 통기타 선율을 타고 흥겹게 흘렀다. 객차에선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영주 시내를 나와 전원 풍경이 깊어진다 싶더니 풍기역에 다다랐다. 시계는 오후 3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시간30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풍기역 대합실에서 소박한 마술쇼를 구경하고 곧장 역 앞에 있는 풍기인삼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 들어서자 인삼향이 짙게 풍겼다. 수삼·홍삼은 물론이고 비누·절편·건빵 등 인삼가공식품도 팔았다. 5년근 수삼이 750g 2만원부터, 홍삼 농축액은 600g에 12만원 정도 했다.

다시 제천역을 거쳐 돌아오는 길, 사위는 이미 칠흑에 잠겼다. 오른쪽으로 남한강이, 그리고 도담삼봉이 차례로 다가왔다 흐릿하게 멀어졌다. 종일 들고만 다닌 책을 펴들었다. 환상열차의 매력은 기차 타는 시간조차 여행의 일부라는 걸 깨닫는 데 있었다. 서울역에 내린 시각은 오후 8시40분. 온종일 기차만 타고 다녔지만 왠지 뿌듯한 하루였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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