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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건국60년 과학기술 60년

FERRIMAN 2008. 7. 22. 09:04

한국 현대과학기술 역사가 시작되다 일본과 미국 유학파, 해방후 과기정책 주도 2008년 07월 22일(화)
지난 60년 간 대한민국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시대에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이 같은 성장 이면에는 발전의 원동력이 된 과학기술이 있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건국 60주년의 해를 맞아, STEPI 등 관계기관과 협력, 1948년 헌법제정 이후 지나온 과학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는 특집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건국 60년 과학기술 60년 1948년 5월10일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보통선거가 실시됐다.

▲ 1946년 경성대학 이공학부 제 1회 졸업사진 

그러나 선거를 앞둔 국내 상황은 선거 자체의 정당성을 쟁취하려는 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세력 간의 격렬한 충돌이 이어지고 있었다. 좌익단체들이 선거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선거반대에 나서자, 경찰은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우익단체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선거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좌익은 투표 참가자들을 매국노로 몰고, 우익은 투표 불참자들을 매국노로 모는 상황에서 1948년 1~5월 사이에 좌, 우익을 포함, 700여 명이 사망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발표된 총선 결과는 한민당과 이승만의 압승이었다. UN 한국임시위원단 통계에 따르면 983만4천 명의 유권자 중 783만7천504명이 선거인으로 등록해, 등록률은 79.7%였으며, 이 중 748만7천649명이 투표해, 투표율은 95.5%에 달했다.

한반도에 역사상 처음 있는 근대 국가가 탄생하고 있는 중에 과학기술계 역시 정부 도움으로 과거 일제의 과학기술이 아닌, 한국의 과학기술을 스스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45년 광복 이후 남한에 진주한 전승국 미국 군정청은 한국인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잠정적인 시정을 폈기 때문에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앞두고 과학기술계와 교육계 일각에서 과학기술 진흥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안동혁 씨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바 있는 안동혁 씨(작고, 전 상공부장관)는 교육계 지도자들과 함께 여러 달을 두고 구상한 끝에 과학기술 중추기관을 설치할 것을 주장, 관심을 모았고, 서울대 교수(화학)로 재직하고 있던 이태규 씨(작고, 전 KAIST 석좌교수)는 강력한 기능을 가진 과학기술부를 정부기구로 신설할 것을 주장, 주목을 받았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당시 서울대 공과대학장이었던 김동일 씨외에 국내 초, 중, 대학교의 교원 500여 명이 “과학교육전담부서를 설치해, 과학교육 진흥을 밀고 나가야 한다”는 진정서를 1948년 3월 제출한 일이다. 이에 앞서 각 도시 학무국장회의에서 ‘과학교육 진흥을 문교정책의 제 1위로 다뤄야 하며, 이를 위해 문교부에 과학교육국을 신설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당국서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건의서가 진정서로 변화한 것이었다.

▲ 김동일 씨 
과학기술계에서 이처럼 과학교육을 담당할 행정기구 신설을 주장한 것은 당시 한국 과학기술계가 인력 등 여러 면에서 그만큼 열악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진흥시키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고, 과학기술에 관한 논의가 도처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전까지 한국인이 이끌던 과학기술 기관이 거의 없었고, 과학기술을 이끌고 갈 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교육상황은 더 열악했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일제시대의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과학교과서를 사용해야 했다. 대학교에서는 전문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공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제시대 이공계대학이 있었던 대학은 한양대, 연희대, 그리고 동아공과학원 정도였는데, 과학기술계 고급 전문인을 양성하는데 있어 한국인을 철저하게 배제한 일제의 차별화정책의 따른 결과였다.

이런 가운데 국내 소수의 과학기술인들은 출신 배경에 따라 일본파와 미국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었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다수의 일본 유학파가 주축을 이루면서 기관 운용을 주도해나갔다. 이들은 식민지 기간 동안 차별을 받기는 했지만, 수적인 우세 속에 교육과 국내 연구 활동을 주도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

▲ 이태규 씨 
대표적인 인물로 경도제대 출신의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 씨, 동경제대 출신의 도상록과 김동일, 구주제대 출신의 안동혁 씨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미국 유학자들은 대부분 군정청의 고위 기술관료로 진출해 활동하고 있었다. 미군정 관계자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 긴밀한 협력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부수립 이전까지 각 부서의 부장과 차장직을 비롯 주요 직책을 차지하면서 과학기술 정책과 행정업무를 담당해왔는데, 이후 관직으로 대거 진출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미시간대 출신의 이원철과 최규남, MIT 출신의 오정수, 컬럼비아대 출신의 나기호, 인디애나대 출신의 조응천 씨 등이 있다.[현암사 간 ‘우리과학 100년’ 참조]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8.07.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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