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중앙일보] 가을의 제주도 엇새

FERRIMAN 2008. 10. 17. 08:59

기사 입력시간 : 2008-10-16 오후 3:23:09
[week&CoverStory] 억새야 어쩌란 말이냐
바람, 분다. 억새, 흔들린다. 바람 분다. 억새, 춤을 춘다. 바람 또 분다. 제주 억새, 목놓아 운다. 동틀녘 정석항공관 건너편 억새 들판에서. [사긴=권혁재 전문기자]
더위가 꺾이고 감귤 익기 전의 제주는 한가하다. 하나 가을을 아는 이들은, 아니 제주를 아는 이들은 바로 이 계절 제주로 든다. 어서 오시라 손짓하는 억새의 부름을 뿌리칠 수 없어서라고 뭍의 것은 주문에 걸린 모양 중얼거린다. 제주의 가을은 가녀리게 몸 떠는 억새로, 너울너울 춤추는 억새로 시종 어지럽다.

제주 억새가 어지러운 건 저 모진 바람 때문이다. 제주는 바람의 섬이고, 억새는 바람으로 인해 비로소 제 몸을 부린다. 하여 제주 억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다. 귀로 듣는 것이다. 서걱서걱, 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되짚는 일이다.

가을 제주를 갔다 왔다. 억새를 보고 싶어서였다. 억새로 이름난 곳은 부러 피해 다녔다. 억새를 맞이할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믿어서였다. 잡초 무성한 벌판 같은 한데에서, 매연 자욱한 찻길 옆에서 억새는 흐벅지다. 제주에서 억새를 만날 때는 혼자여도 좋다. 우리는 지금 가을여행을 말하고 있어서다.

제주도
1 억새 천지를 찾아내다 - 정석항공관 건너편 들녘

제주관광대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고남수 교수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정석항공관 건너편 벌판으로 가보라고, 제주 억새 1번지로 통하는 산굼부리 못지않은 군락지가 인근에 숨어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지도엔 물론 표시가 없었다. 하나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주 지도에서 정석항공관만 집어내면 될 일이었다. 억새 천지는, 정석항공관 바로 건너편에 난 샛길 안에 있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마자 시야가 환해졌다. 은빛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눈이 부셨다.

평소 사람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억새는 어른 키만큼 훌쩍 커 있었고, 억새밭 안에도 사람이 지난 티는 없었다. 사람 무서워 않는 노루가 억새밭 곳곳에서 한가로이 뛰어놀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불편한 점도 있었다. 억새밭 사이로 제법 크게 난 길은 거칠고 험했다. 레저용 차량 아니고선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말하자면 여기는 아침 포인트다. 억새 들판은, 성산포 너머에서 뿌려대는 아침 햇살로 아침의 성산포 바다 모양 반짝인다. 여기 억새는 유달리 질감이 풍성하다. 잡풀 하나 섞이지 않고 오롯이 억새만 무리를 지어서 그런가 보다.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곳이다.

2 한라산 끼고 오르는 억새 산행 - 노꼬메오름

제주엔 모두 368개의 오름이 있다. 어떤 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그쳐 소떼가 자유로이 노니는 곳이지만, 어떤 건 제법 깊은 산의 모양새여서 단단히 산행을 작정해야 한다. ‘족은’(‘작은’의 제주 방언) 오름에선 제주 사람의 체취를 느낄 수 있고, 큰 오름에선 ‘곶자왈’(원시림) 특유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수백 개 오름 중에 노꼬메오름도 있다. 한라산 서쪽 기슭, 제1 산록도로라 불리는 1117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해발 833m의 오름이다. 오름치곤 꽤 높은 편이다. 1117번 지방도로가 1135번 지방도로와 만나기 직전에 진입로가 나 있다. 원래는 ‘놉고메’라 불렸다가 ‘노꼬메’로 소리가 바뀌었고, 이를 반영해 한자 표기도 녹고산(鹿高山)이 됐단다.

오름 정상까지는 한 시간 산행이 필요하다. 처음 40분 정도는 숲속 오솔길을 걷는다. 오름 트레킹이라기보단 일반 산행이 어울릴 법한 코스다. 오름 트레킹 대부분은 볼록한 능선을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정상까지가 노꼬메오름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다. 능선을 올라타는데 길을 따라 양 옆에 억새가 피어 있다. 능선 오른쪽으로는 한라산 정상이 바라다 보인다. 한라산을 끼고 오르는 억새 산행이라. 흔치 않은 경험이다.

3 억새도 원시림이 있다 - 따라비오름 아래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이 생전에 살다시피 했다는 억새 군락지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박훈일 관장이 안내했다.

들판이 아니라 평원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전봇대 하나 뵈지 않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멀찌감치 낮게 엎드린 따라비오름 앞으로 온통 억새만 흐드러졌다.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라 아예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 억새는 2m도 넘어 보였다. 억새밭 안에서 폭 파묻혔다. 아직도 이런 야생 초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마냥 고마웠다.

찾아가는 길이 영 까다로웠다. 97번 지방도로를 타고 대천동 네거리에서 성읍 쪽으로 가다 보면 사이프러스컨트리클럽과 성읍2리 버스정류장 사이에 오른쪽으로 샛길이 나 있다. 그 길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고약한 진흙탕 길이 시작된다. 4륜구동 차량이 용을 써야 통과할 수 있다.

억새 들판은 사이프러스컨트리클럽 땅이다. 언제 이 억새 천국이 개발될지 몰라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다음번에도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길 혼자 빌었다. 중산간 초원을 제 집 삼아 살았던 김영갑이 왜 유독 예를 아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곳이다.



4 길에서 만나는 억새 - 평화로 위에서

제주 억새는 모나지 않아 좋다. 느긋한 드라이브만으로도 억새를 만끽할 수 있어 좋다. 뭍의 억새 명소는 하나같이 산에 든 다음에야 제 본색을 드러낸다. 제주의 억새는 사람 옆에 서 있다. 제주 가을을 은빛으로 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주에서 억새는 굼부리(분화구) 언저리 마다하지 않고, 올레(골목) 구석 가리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지천으로 넘실댄다.

억새 길 몇 군데를 짚는다. 우선 섬 동남쪽에 1119번 지방도로가 있다. 주위로 크고 작은 오름이 오소소 돋은 길이다. 아침나절 성읍에서 성산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오름과 맞닥뜨린다. 한라산 자락에선 북쪽 기슭을 가로지르는 제1 산록도로(1117번 지방도로)와 남쪽 기슭을 타고 도는 1115번 지방도로가 있다. 비탈에 기대 고개 휘적이는 억새가 눈에 밟히는 길이다.

끝으로 평화로라 불리는 1135번 지방도로의 제주 경마장부터 이시돌목장 입구까지 구간.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억새도 좋지만 새별오름 근처나 이시돌목장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보는 건 더 좋다. 해질녘이 특히 예쁘다. 제주도는 18∼19일 새별오름 일대에서 억새꽃 축제를 연다.

제주=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