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활동

[사이언스타임즈] 렘피카의 작품세계

FERRIMAN 2010. 5. 19. 20:36

보수적 화단에 性적 도발을 던지다 외모와 명성을 이용한 렘피카의 작품들 2010년 05월 19일(수)

명화 산책 탁월한 외모가 경쟁력이다. 사람들은 보통 외모가 출중한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꽃에 매료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신의 탁월한 외모를 인생을 살아가는 도구로 사용했던 화가가 렘피카다. 여성 미술가로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그것을 도발적인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한 렘피카는 19세기 말 폴란드 바르샤바 상류층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부모의 이혼 후 부유한 할머니 덕분에 일류 스위스 기숙학교에서 상류층 교육을 받는다. 1916년 가난하고 잘생긴 러시아 변호사와 결혼하지만 러시아 혁명 후 남편이 볼세비키들에 의해 감금되는 일을 겪게 되자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렘피카는 모리스 드니와 앙드레 로트 아래서 그림을 공부하며 당시 문화계 주요 인사들과 교류한다. 램피카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동경했던 삶을 살기로 한다.

화가로서의 동경했던 삶 담은 <녹색 부가티를 타는 타마라>

렘피카가 자신의 동경을 담은 작품이 <녹색 부가티를 타는 타마라>다. 이 작품은 렘피카의 자화상이자 대표작으로, 그녀는 직업보다는 영화배우 그레타가르보를 연상시킬 정도의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로 유명했다.

▲ <녹색 부가티를 타는 타마라>-1925년, 목판에 유채, 40*90, 개인소장 

붉은 색 입술을 바른 여인이 녹색 부가티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 그녀의 눈은 반쯤 잠겨 있고 깊게 눌러쓴 실크 모자 사이로 금발이 보인다. 목에 두른 실크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고 있는 모습은 무표정한 얼굴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붉은색 입술은 여성의 유혹을 상징하고 있으며 자동차는 남성을 암시한다. 남성은 여성의 지배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렘피카는 부가티를 소유한 적이 없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통해 여성의 욕망을 그렸다. 또한 그녀는 차가운 스타일의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적 성공을 자축하고 있다.

레즈비언 과감하게 묘사해 충격던진 <두 여자>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렘피카는 여성으로서의 한계에 부딪친다. 당시 화가는 남성들의 세계였고, 여성의 창의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렘피카는 뛰어난 외모로 남자들을 사로잡으면서도, 화단의 주목을 받기 위해 미술의 전통과 관습을 깬다. 자신의 성적 경험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면서 보수적인 화단에 정면으로 승부한 것이다.

여성의 누드화는 남성의 전유물이었지만 렘피카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성적 욕망이 불타는 레즈비언의 성행위를 과감하게 묘사해 충격을 던졌다.

그녀가 여성 동성애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 <두 여자>다. 이 작품은 여자들이 사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두 여인>-1923년, 캔버스에 유채, 130*160, 제네바 작은성 갤러리 소장 

렘피카는 양성애자로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접근해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화실에서 렘피카는 여자 모델들과의 경험을 작품을 담아냈다.

침대 위 녹색 시트 위에 누워 있는 여자는 쾌락에 젖어 눈을 감고 있고, 앉아 있는 여인은 상대의 무릎에 손을 얹고 허벅지를 애무하고 있다. 두 여인의 자세는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다.

렘피카는 이 작품에서 입체주의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데 부드러운 곡선과 각으로 표현된 여성의 육체는 역동적이면서 율동감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매춘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지만 전시회에서 여성이 동성애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여성의 누드화는 남성 전유물로서 여류 화가들은 꽃이나 풍경 집안을 그리는 것에 만족했었다. 19세기 말 금기시되었던 동성애를 과감하게 표현한 이 작품으로 렘피카는 화단에서 스타가 되었다.

인정 못 받은 말년에도 불구… 70년대 들어 재조명 되기도

파리 미술계의 스타가 된 렘피카는 전쟁 기간 동안 작가, 연예인, 예술가, 과학자, 기업인, 망명한 동 유럽의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녀는 사교계의 중요 인사들을 세련되고 퇴폐적인 모습으로 묘사해 인기를 끌었다. 렘피카의 방식은 당대 초상화가들 중에서 가장 찬사를 받았다.

가난한 망명가의 아내로 만족하지 못했던 렘피카는 무용수 나나 데 헤레나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그녀의 후견이었던 부자 바론 쿠프너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 후 바론 쿠프너와 결혼해 부와 명성을 동시에 갖는다.

렘피카는 남편과 함께 1939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 할리우드로 이주한다. 할리우드는 렘피카의 화려한 생활을 만족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었고 그녀는 사교계의 중심인물이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렘피카는 부자의 아내였지 화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모님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렘피카는 1950년대 미국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이 위축되자 파리에서의 영광을 찾기 위해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선보인다. 당시 미국은 추상 표현주의가 대세였다. 그녀는 추상미술을 선보이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렘피카는 남편이 죽자 멕시코에서 자신에게 성공을 안겨주었던 대표작들을 모사하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말년에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다.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는 매혹적이고 우아한 주제를 아르데코 방식으로 표현해 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들은 1920~30년대 전성기 이후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았지만, 1970년대 들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다. 특히 렘피카의 작품은 광고 포스터로 많이 복제되었다.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2010.05.19 ⓒ ScienceTimes
Copyright(c) 2008 Korea Science Foundation. All Right Reserved.
E-mail : ScienceTimes@scienceTimes.co.kr
프린트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