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시시각각] 원고에 대비할 때다
그런데 여기서 한 호흡만 쉬어보자. 크게 보면 일본의 과민 반응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1985년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25년을 엔고에 시달려 왔다. 잃어버린 10년, 아니 20년이 다 엔고 때문에 나왔다고 여긴다. 피해의식이 남다를 만하다.
한국도 큰소리칠 게 못 된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원고(圓高·환율 하락)는 ‘천하에 몹쓸 것’이 됐다. 원고를 부추기면 망국 또는 반역세력으로 취급받았다. 나라가 사실상 부도를 맞다 보니 그 충격이 워낙 컸던 탓이다. 덕분에 원저(圓低·환율 상승)는 좋은 점만 부각됐다. 원화가치가 몇 % 떨어지면 수출이 얼마 늘고 경상흑자가 얼마 늘어나며, 성장률이 몇 % 늘어난다 등등.
그러나 세상에 모두 좋은 건 없다. 원저도 마찬가지다. 원저는 수입 물가를 높여 국내 물가 상승→내수 위축→설비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년 전 달러당 1000원이던 원화 값이 5% 내리면 ▶민간소비는 0.69%포인트 ▶총투자는 0.83%포인트 줄며 ▶소비자 물가는 0.49%포인트 오를 것으로 예측했다. 경상수지는 56억8000만 달러 늘지만 이는 “소비자 및 내수 기업에 세금을 물려 수출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원고는 물가를 낮추고 소비를 늘리며 실질 임금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원저에 비하면 시쳇말로 ‘친서민’에 가깝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자. 국제 시장에서 원화는 몇 년 새 가장 저평가된 통화로 꼽힌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주 나라별 실질실효환율을 발표했다. 실질실효환율은 물가까지 따져 나라별 환율 수준을 비교한 것이다. 2005년을 100으로 잡고 이보다 낮으면 저평가, 높으면 고평가됐다고 본다. 지난달 말 현재 원화는 81.67로 달러화(89.41)는 물론 엔화(103.95)나 위안화(119.65)보다 많이 저평가돼 있다. 물론 2005년은 원화가치가 최근 10년간 가장 높았던 때라 비교 시점이 우리에겐 좀 불리하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5년 동안 원화가치가 위안화나 엔화에 비해 덜 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일본이 한국을 다그친 데도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환율전쟁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자칫 넋 놓고 있다간 한국이 최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해법은 있다. 우리가 먼저 원고를 받아들이는 거다. 예컨대 위안화와 묶어 수준과 기간을 정하는 것이다. ‘3 년 내 20% 절상’ 식이다. 장점도 많다. 기업이나 가계에 준비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 당분간 급격한 외환 유출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거세지는 물가 상승 압력도 줄일 수 있다. G20 의장국이 솔선수범한다는 명분도 얻을 수 있다. 마침 대통령도 엊그제 “G20에서 환율 전쟁을 막는 데 적극 중재하겠다”고 밝혔다. 내 손발을 먼저 묶겠다고 나서면 극적 타협안을 이뤄낼 가능성도 커진다. 무엇보다 무역의존도 세계 최고, 수출 비중 G20 중 최고, 그 바람에 10원만 원화가치가 올라도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오는 대한민국 경제 체질도 바꿀 수 있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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