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6월 10일 (금) 02:32 중앙일보
그 길 속 그 이야기 (15) 토영이야∼길
[중앙일보 손민호] 경남 통영. 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를 묘사할 수 있는 한 줄의 문장은 없다. 시인 정지용도 통영 앞에서는 자신의 필력이 모자란다고 토로했다는데,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일이다.
돌이켜보니 통영은 늘 사무쳤다. 등대가 예쁜 섬이 보고 싶어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도 했고, 긴 세월 고향을 떠났다 기어이 고향땅에 돌아와 묻힌 한 작가 생각에 울며 달려가기도 했다.
담벼락에 벽화 그린 달동네에서 넘어가는 저녁 해를 하염없이 바라본 적도 있다. 그래도 시인 백석보다는 덜 사무쳤을 것이다. 옛 시인은 오로지 한 여인 생각에 이 먼 길 달려왔으니.
다시 통영에 내려갔고, 이번엔 무릎이 시리도록 걸어다녔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 plovesonjoongang.co.kr >
# 통영을 여행하는 마지막 방법
남망산 공원에 오르면 바다 건너 미륵도가 보인다. 남망산은 통영시민의 대표적인 휴식처로, 조각공원이 조성돼 있다.
통영을 여행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 맛 여행이 있다. 겨울 굴, 봄 도다리, 여름 하모(갯장어), 가을 전어 등 사시사철 싱싱하고 푸짐한 해산물이 올라오고, 충무김밥·꿀빵·우짜(자장면 소스를 얹은 우동) 등 특산 별미도 걸음을 부추긴다. 소주를 주문하면 안주가 추가되는 '다찌'라는 방식의 선술집도 있고, 중앙시장은 회를 먹으러 서울에서 관광버스가 내려온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박혀 있는 섬 여행을 떠날 때도 통영은 거점이 된다. 거제도를 갈 때도 통영을 거쳐야 하고, 등대섬으로 유명한 소매물도도 통영에서 배를 타야 한다. 한산도·욕지도·사량도·연화도·비진도 등 최근 떠오른 남해안 명소는 통영시가 거느리고 있는 부속 섬이다.
역사 기행에서도 통영은 빠뜨릴 수 없는 도시다. 통영이라는 이름이 이순신 장군 때문에 생겼다. 이순신 장군이 처음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고, 이후 한산도에 있던 통제영이 뭍으로 옮겨온 뒤 마을 이름도 통영이 됐다. 학익진을 펴고 왜군을 물리쳤던 한산대첩의 현장도 통영 앞바다에 있다.
통영에서 먼저 생겨나 전국에 아류를 낳고 있는 명소도 있다. 하나는 미륵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다. 지난해에만 121만 명이 이용하는 등 2008년 4월 개통한 이래 200만 명 이상이 케이블카를 탔다. 통영의 성공사례를 들어 전국 지자체마다 자기네도 케이블카 허가를 내달라고 아우성이다. 다른 하나는 벽화마을의 원조 동피랑마을이다. 통영의 작은 달동네 동피랑마을이 벽화로 관광객을 불러모으자 다른 도시의 달동네도 저마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넣느라 법석을 떨고 있다.
무엇보다 통영은 국내 최고의 예술도시다. 문학·미술·음악 등 각 부문을 대표하는 거장을 통영은 유독 많이 배출했다. 문학에 유치진·유치환·김춘수·김상옥·박경리 등이, 미술엔 전혁림이, 음악에는 윤이상이 있다. 다른 동네에서는 한 명만 있어도 소란을 피웠을 만큼 쟁쟁한 이름이다. 그들의 흔적을 좇는 걸음만으로도 통영은 충분한 여행의 이유가 된다.
통영을 여행해야 하는 이유는 이토록 제각각이다. 여기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자. 통영 여행의 이유가 되는 장소 하나하나를 점이라 생각하고 이 점을 선으로 잇자.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천하의 걷기여행 코스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해서 나온 길이 '토영이야∼길'이다. 지난해 통영시와 통영문화재단이 조성했고,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가 됐다. 이 길 안에 통영을 여행해야 하는 거의 모든 이유가 들어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뿔뿔이 흩어져 있던 낱개의 명물들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통영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완성한다. 토영이야∼길이 통영을 여행하는 마지막 방법인 까닭이다.
# 토영이야∼길을 걷다
박경리 묘소 앞에서 내려다본 통영 앞바다.
미륵산 정상에서 박경리 묘소로 내려가는 길. 숲이 울창하다.
통영시내 초정거리에서. 초정 김상옥 선생 동상 옆에 앉아 한 일꾼이 간식을 먹고 있다.
동피랑마을에서.
해저터널. 일제가 건설한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다.
토영이야∼길은 다소 엉뚱한 이유로 국내 유일의 길이기도 하다. 길을 호명할 때 강세를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영이야∼길에서 '토영'이 통영의 방언인 것을 알겠는데, '이야∼'는 모르겠다. 세상에는 '통영이야기길'로 알려져 있다. 통영 곳곳에 배어 있는 숱한 이야기를 따라 걷는 길이어서다.
하나 본래 의도는 전혀 다르다. '이야∼'는 누이를 부를 때 붙는 경상도 방언이다. '누이야'에서 '누'보다 '이'에 강세를 두면 언뜻 '이야∼'로 들리는 것에서 착안했다. 하여 토영이야∼길을 발음하려면 '이'에 잔뜩 힘을 줘야 한다. 토영이야∼길은 글자 그대로는 '통영 누이길'이 되고, 넓은 의미로는 정겨운 어조로 통영을 호출하는 행위가 된다.
토영이야∼길은 두 개 코스를 합해 모두 25㎞에 이른다. 통영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10㎞ 거리의 길이 1코스인데, 이 안에 통영이 자랑하는 명물 대부분이 들어 있다. 초정거리(초정 김상옥의 거리)·청마거리(청마 유치환의 거리)·세병관·박경리 생가·윤이상 기념공원·남망산·동피랑마을·중앙시장 등 들러야 할 장소만 34곳에 이른다. 그러나 윤이상 기념공원만 빼고는 강구안이라 불리는 통영항을 둘러싸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든다.
길목마다 번호가 매겨진 이정표가 있지만, 굳이 번호를 따라서 다닐 필요는 없다. 내키는 대로 걸어서 다녀오면 그만이다. 청마 시편 한 줄 외우고 있으면 청마거리에 가서 청마가 편지를 부쳤다는 중앙우체국에 들러 그리운 이에게 엽서 한 장 띄울 일이고, 고단한 일상에 쫓겨 내려온 걸음이면 동피랑마을에 올라 화사한 얼굴로 맞이하는 달동네의 설움을 보고 돌아오면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영 시내 풍경이다. 윤이상·전혁림·유치환·김춘수 등 예술인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도 있고, 담벼락에 있고, 보도블록 위에도 그들은 있었다. 당대 거장의 예술혼이 무덤덤한 일상에 스며들어와 있는 통영에서의 삶이 부러웠다.
2코스는 해저터널에서 시작한다. 일제가 건설한 해저터널을 걸어서 통과하면 미륵도에 도착한다. 미륵도에서는 미륵산 정상에 올라 박경리기념관을 들렀다 온다. 모두 15㎞에 이르고, 미륵산 산행이 많아 1코스보다는 험한 편이다. 그래도 흙을 밟을 수 있어 걷는 재미는 2코스가 낫다.
미륵산에서 내려오면 한산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 위에 박경리 묘소가 있다. 이태 전 찾았을 때는 왠지 휑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기념관 건물도 완공됐고 꽃나무도 제법 뿌리를 내려 그윽해 보였다. 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폐암이 걸렸어도 담배를 끊지 않았던 생전의 당신이 생각나 담배 한 대 올리고 돌아섰다.
● 길 정보
토영이야∼길은 통영의 관광명소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 이 중에는 맛집도 있는데, 횟집은 중앙시장과 서호시장, 그리고 통영여객터미널 근처에 몰려 있다. 4명이 10만원이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강구안 문화마당 바로 앞에 원조 충무김밥집인 '뚱보할매김밥집(055-645-2619)'이 있다. 4500원. '군대 간 통영 남자가 가장 그리워하는 맛'이라는 오미사꿀빵(055-645-3230)도 강구안 근처에 있다. 10개 들이 1박스에 7000원. 2코스에 대안 코스가 있다. 미륵산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것이다. 편도요금 5500원, 왕복요금 9000원. 055-649-3804. 통영시향토역사관(055-650-4593)에 문화해설사가 상주한다. 미륵도에 있는 숙소 중에 ES리조트(www.esresort.co.kr)가 있다.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회원 가입 의사가 있으면 체험숙박 형식으로 묵을 수 있다. 35평형 45만5000원. 055-508-2323. (재)통영문화재단 055-644-6800, 통영시 관광과 055-650-4610.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토영이야∼길' 영상을 중앙일보 인터넷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돌이켜보니 통영은 늘 사무쳤다. 등대가 예쁜 섬이 보고 싶어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도 했고, 긴 세월 고향을 떠났다 기어이 고향땅에 돌아와 묻힌 한 작가 생각에 울며 달려가기도 했다.
담벼락에 벽화 그린 달동네에서 넘어가는 저녁 해를 하염없이 바라본 적도 있다. 그래도 시인 백석보다는 덜 사무쳤을 것이다. 옛 시인은 오로지 한 여인 생각에 이 먼 길 달려왔으니.
다시 통영에 내려갔고, 이번엔 무릎이 시리도록 걸어다녔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 plovesonjoongang.co.kr >
# 통영을 여행하는 마지막 방법
통영을 여행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 맛 여행이 있다. 겨울 굴, 봄 도다리, 여름 하모(갯장어), 가을 전어 등 사시사철 싱싱하고 푸짐한 해산물이 올라오고, 충무김밥·꿀빵·우짜(자장면 소스를 얹은 우동) 등 특산 별미도 걸음을 부추긴다. 소주를 주문하면 안주가 추가되는 '다찌'라는 방식의 선술집도 있고, 중앙시장은 회를 먹으러 서울에서 관광버스가 내려온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박혀 있는 섬 여행을 떠날 때도 통영은 거점이 된다. 거제도를 갈 때도 통영을 거쳐야 하고, 등대섬으로 유명한 소매물도도 통영에서 배를 타야 한다. 한산도·욕지도·사량도·연화도·비진도 등 최근 떠오른 남해안 명소는 통영시가 거느리고 있는 부속 섬이다.
역사 기행에서도 통영은 빠뜨릴 수 없는 도시다. 통영이라는 이름이 이순신 장군 때문에 생겼다. 이순신 장군이 처음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고, 이후 한산도에 있던 통제영이 뭍으로 옮겨온 뒤 마을 이름도 통영이 됐다. 학익진을 펴고 왜군을 물리쳤던 한산대첩의 현장도 통영 앞바다에 있다.
통영에서 먼저 생겨나 전국에 아류를 낳고 있는 명소도 있다. 하나는 미륵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다. 지난해에만 121만 명이 이용하는 등 2008년 4월 개통한 이래 200만 명 이상이 케이블카를 탔다. 통영의 성공사례를 들어 전국 지자체마다 자기네도 케이블카 허가를 내달라고 아우성이다. 다른 하나는 벽화마을의 원조 동피랑마을이다. 통영의 작은 달동네 동피랑마을이 벽화로 관광객을 불러모으자 다른 도시의 달동네도 저마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넣느라 법석을 떨고 있다.
무엇보다 통영은 국내 최고의 예술도시다. 문학·미술·음악 등 각 부문을 대표하는 거장을 통영은 유독 많이 배출했다. 문학에 유치진·유치환·김춘수·김상옥·박경리 등이, 미술엔 전혁림이, 음악에는 윤이상이 있다. 다른 동네에서는 한 명만 있어도 소란을 피웠을 만큼 쟁쟁한 이름이다. 그들의 흔적을 좇는 걸음만으로도 통영은 충분한 여행의 이유가 된다.
통영을 여행해야 하는 이유는 이토록 제각각이다. 여기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자. 통영 여행의 이유가 되는 장소 하나하나를 점이라 생각하고 이 점을 선으로 잇자.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천하의 걷기여행 코스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해서 나온 길이 '토영이야∼길'이다. 지난해 통영시와 통영문화재단이 조성했고,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가 됐다. 이 길 안에 통영을 여행해야 하는 거의 모든 이유가 들어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뿔뿔이 흩어져 있던 낱개의 명물들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통영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완성한다. 토영이야∼길이 통영을 여행하는 마지막 방법인 까닭이다.
# 토영이야∼길을 걷다
토영이야∼길은 다소 엉뚱한 이유로 국내 유일의 길이기도 하다. 길을 호명할 때 강세를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영이야∼길에서 '토영'이 통영의 방언인 것을 알겠는데, '이야∼'는 모르겠다. 세상에는 '통영이야기길'로 알려져 있다. 통영 곳곳에 배어 있는 숱한 이야기를 따라 걷는 길이어서다.
하나 본래 의도는 전혀 다르다. '이야∼'는 누이를 부를 때 붙는 경상도 방언이다. '누이야'에서 '누'보다 '이'에 강세를 두면 언뜻 '이야∼'로 들리는 것에서 착안했다. 하여 토영이야∼길을 발음하려면 '이'에 잔뜩 힘을 줘야 한다. 토영이야∼길은 글자 그대로는 '통영 누이길'이 되고, 넓은 의미로는 정겨운 어조로 통영을 호출하는 행위가 된다.
토영이야∼길은 두 개 코스를 합해 모두 25㎞에 이른다. 통영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10㎞ 거리의 길이 1코스인데, 이 안에 통영이 자랑하는 명물 대부분이 들어 있다. 초정거리(초정 김상옥의 거리)·청마거리(청마 유치환의 거리)·세병관·박경리 생가·윤이상 기념공원·남망산·동피랑마을·중앙시장 등 들러야 할 장소만 34곳에 이른다. 그러나 윤이상 기념공원만 빼고는 강구안이라 불리는 통영항을 둘러싸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든다.
길목마다 번호가 매겨진 이정표가 있지만, 굳이 번호를 따라서 다닐 필요는 없다. 내키는 대로 걸어서 다녀오면 그만이다. 청마 시편 한 줄 외우고 있으면 청마거리에 가서 청마가 편지를 부쳤다는 중앙우체국에 들러 그리운 이에게 엽서 한 장 띄울 일이고, 고단한 일상에 쫓겨 내려온 걸음이면 동피랑마을에 올라 화사한 얼굴로 맞이하는 달동네의 설움을 보고 돌아오면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영 시내 풍경이다. 윤이상·전혁림·유치환·김춘수 등 예술인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도 있고, 담벼락에 있고, 보도블록 위에도 그들은 있었다. 당대 거장의 예술혼이 무덤덤한 일상에 스며들어와 있는 통영에서의 삶이 부러웠다.
2코스는 해저터널에서 시작한다. 일제가 건설한 해저터널을 걸어서 통과하면 미륵도에 도착한다. 미륵도에서는 미륵산 정상에 올라 박경리기념관을 들렀다 온다. 모두 15㎞에 이르고, 미륵산 산행이 많아 1코스보다는 험한 편이다. 그래도 흙을 밟을 수 있어 걷는 재미는 2코스가 낫다.
미륵산에서 내려오면 한산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 위에 박경리 묘소가 있다. 이태 전 찾았을 때는 왠지 휑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기념관 건물도 완공됐고 꽃나무도 제법 뿌리를 내려 그윽해 보였다. 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폐암이 걸렸어도 담배를 끊지 않았던 생전의 당신이 생각나 담배 한 대 올리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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