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대리점 관리업무를 맡고 있는 박모(40) 씨는 밤에 일찍 자고 출근해도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기 힘들다. 세수를 하고, 다리를 꼬집고, 커피를 몇 잔씩 들이켜도 졸음을 이겨내기 힘들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기고 그동안 별로 걱정하지 않았지만, 요즘 급격히 잦아지는 졸음 때문에 결국 병원을 찾았다. 업무상 운전을 할 일이 많은 박 씨로서는 졸음이 곧 사고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찰 결과 박 씨는 '기면증(嗜眠症, narcolepsy)'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장마철 이후 열대야가 지속되면서 최근 들어 수면 부족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야간에 충분한 수면을 취했는데도 졸음이 끊임없이 밀려오거나, 낮 시간에도 참기 힘든 졸음이 수일 지속되면 수면 부족으로 인한 졸음이 아닌 '기면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기면증의 다양한 증상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하다고 볼 수 있는 기면증은 낮에 심하게 졸리며,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하는 무관하게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드는 것이 특징인 수면 장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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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면증은 업무중에도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든다. | 이처럼 과도한 한낮의 졸음은 보통 기면증의 첫 증상인데 식사 직후나 강의를 듣는 동안 누구나 느끼게 되는 일반적인 피로감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 있어야 정상인 시점에 자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보거나 회의 중이거나 시내 중심가에서 운전할 때에 잠에 빠져드는 경우이다.
기면증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증상은 탈력 발작이다. 탈력 발작은 근육의 힘이 짧은 시간 동안 갑작스럽게 빠지는 현상으로, 잠깐 무릎에 힘이 빠지거나 그런 느낌이 드는 정도로 약하게 올 수 있다. 연체동물처럼 몸이 풀어져 완전히 맥없이 주저앉거나 넘어지기도 한다.
이밖에 가위눌림(수면마비)이 잦거나 잠들기 전후 꿈과 같은 환각이 생길 때(입면 환각), 야간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할 때(야간 수면 방해)에는 기면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기면증이 위험한 이유
잠이 아무리 많아도 생명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기면증의 문제는 증상 자체보다 졸음으로 발생하는 2차 사고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는 데 있다. 단순 졸림 현상으로 여기고 질환을 방치했다가는 운전이나 기계 조작 중 졸음이 발생해 환자와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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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면증은 졸음운전과 관계가 있다. | 실제로 지난해 한국도로공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고속도로 교통사고 사망자 중 31%가 졸음운전에 의한 것으로 집계됐다.
또 기면증은 학습 능률과 업무 효율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환자의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면증과 삶의 질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면증 환자가 겪는 고통은 파킨슨병, 간질 환자와 유사한 수준으로 보고됐고 아울러 기면증 환자의 경우 청소년 시절 학습 능률 저하로 성적이 떨어지거나 교우 관계에서 문제를 겪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성인 환자 역시 원활한 사회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기면증의 원인과 치료방법
기면증은 아직까지 인식부족으로 인해 조기 진단되지 않고 뒤늦게 치료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역학조사 결과, 인구 100만명당 500명이 기면증 환자인 것으로 드러났고 우리나라의 경우, 5천만명 중 약 2만5천명 정도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면증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얼마 전까지 해도 유전에 따른 체질이나 바이러스 감염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병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히포크레틴'이라는 각성 호르몬이 부족하여 기면증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시상하부의 신경전달 물질 중 하나인 히포크레틴은 우리 몸에서 형광등을 켜는 전기 스위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낮에 활동할 때는 각성 상태를, 밤에는 잠에 빠지게 하는데, 이 호르몬이 줄게 될 경우 형광등이 깜빡이는 것과 같이 낮에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고, 밤에는 잘 자지 못하는 기면증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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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수면학회가 주관한 기면증에 대한 캠페인 ⓒ대한수면학회 | 기면증에 대한 치료를 받으면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지낼 수 있는데 환자의 65~85%는 약물로써 증상이 호전된다. 약물 치료제로는 '프로비질'이 유일한데 수면에 관련된 중추에만 작용하는 세계 최초의 기면증 치료제로, 메틸페니데이트와 같은 각성제와 달리 의존성과 습관성이 낮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프로비질은 각성제로 분류되는 유사약물과 달리 의존성을 유발하지 않고, 사용을 중단해도 금단증상을 유발할 위험성이 적어 안전하다. 12시간 지속되어 하루 한번 복용으로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낮 시간의 과다수면만 깨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밤 시간 중 충분한 수면도 가능하다.
이밖의 치료방법으로는 행동치료, 환경조절요법 등이 있다. 행동 치료는 규칙적인 수면습관을 갖도록 기상과 취침시각을 일정하게 만들고 심한 주간 졸음증이 있을 때 15∼20분의 짧은 낮잠을 두 번 정도 자게 한다.
환경조절요법으로는 주변 사람에게 기면증에 대해 알려주고 환자가 소외되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직업도 가급적이면 잠을 쉽게 잘 수 있는 사무직보다 영업이나 생산 등 몸을 움직이는 업무를 하도록 추천한다.
대한수면학회에서는 진단을 위한 방법으로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활용하고 있는데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상황에서의 졸린 정도를 통해 기면증 증상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대한수면학회 관계자에 따르면 "기면증은 약물 치료를 통해 증상 완화가 가능한 질병으로 이를 간과하고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사고나 삶의 질 저하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주간에 참기 힘든 졸음이 지속된다면 병원을 방문해 전문적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