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정적으로 답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연구 분야마다 각자의 연구 대상에 적합한 연구 방법론을 조금씩 다르게 발전시켜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해 무엇이 ‘비과학적’ 연구인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대표적인 예가 성급한 일반화이다. 자기 경험에만 근거하여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으로 함부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이야기 하거나, 특수한 조건에서 수행된 조사 결과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무리하게 이끌어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연구 방법이 ‘비과학적’임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인기 주제에 대해 소위 ‘섹시한’ 주장을 하는 연구는 그 연구가 얼마나 경험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갖는지와 무관하게 세간의 주목을 받고 결국에는 ‘상식’으로 굳어지기 쉽다. 최근 ‘창조 경제’ 담론 덕분에 부쩍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창의성’의 원천에 대한 몇몇 주장들이 그렇다.
창의적이라 알려진 과학자들의 기이한 행적을 소개하면서 마치 그 행적이 창의성의 징표 내지 원인인 것처럼 선전하곤 한다. 아인슈타인의 학교 성적이 나빴다는 ‘사실’을 들어(사실이 아니다!), 대중 교육으로는 창의적 인재를 길러낼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든지, <빅뱅이론>에 등장하는 괴짜 물리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천재성의 징표라는 대중적 믿음이 이에 해당된다.
성급한 일반화의 문제점은 분명하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되도록 많은 사례를 모아 일종의 패턴을 찾는 일이다. 즉, 한두 명의 대중적 천재의 삶에서 남들과 다른 특이한 점을 찾아 그것을 신비화하기 보다는, 창의적이었다고 평가되는 다수의 인물에 대해 통계적 분석을 통해 일련의 특징을 추출하는 것이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첫째에 비해 반항아적 기질이 있는 둘째가 혁신적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설로웨이의 고전적 연구가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런 통계적 분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통계적 분석의 특성 상 각기 다른 지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몇 가지 미리 선정된 변수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한 인물의 성향과 재능이 계발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복합적 요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분석 과정에서 사장되기 쉽다.
더욱 결정적인 문제는 이런 통계적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기껏해야 창의적 인물이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상관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통계적 분석만으로는 그러한 특징이 창의성의 근원이라는 인과 관계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둘째가 반항아적 기질을 갖기 쉬워 혁신적 인물이 된다는 설명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실제 그러한 인과 관계의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 쉽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수십 년간 창의성을 연구한 미하이 첵센트미하이의 <창의성의 즐거움(원제: Creativity)>은 매우 특별한 가치를 갖는다. 칙센트미하이는 우선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처럼 몇몇 유명한 인물에만 집중하는 대신, 인류의 지걱 유산의 여러 분야에서 창의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과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골고루 선정하여 이들의 삶과 연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통계적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양적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질적 연구도 병행하여 자신의 연구를 보다 종합적이고 설득력있게 만들었다. 선정된 창의적 인물 중에서 연구 당시 생존한 사람들을 모두 심층 인터뷰 하여 그들의 삶과 연구에 대한 내밀한 목소리와 사회문화적 요인을 이끌어 낸 것이다. 결국 이같은 연구를 통해 칙센트미하이는 이 책에서 창의성과 상관관계를 갖는 요인을 추출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학술적 연구 및 예술적 성취에서 창의성이라는 것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의 발휘를 위해서는 어떤 요인이 결정적인 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개별 학문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창의적 업적의 근원은 세 가지 요인의 상호작용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culture)’, ‘개인(person)’, ‘전문현장(field of experts)’이 그것이다. 여기서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개인’ 요인이다. 멍청한 사람이 위대한 연구를 수행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재능이 창의적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제한적이다. 여러 경험 연구를 통해 IQ가 125을 넘으면 지능지수와 창의적 연구 사이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꽤 괜찮은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문화’ 요인과 ‘전문현장’ 요인이 창의적 연구 수행을 위해 결정적이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문화’란 해당 학문 분야가 축적해 온 상징적 지식 체계 전반을 의미한다. ‘전문현장’이란 어떤 것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 그리고 ‘타당한’ 해답의 형태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명시적,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기준을 의미한다. 이런 기준은 학문 분야마다 다르고 직관적으로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공적인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개인은 헤당 기준을 연구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체득해야만 한다. 이것들을 배워야만 나중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해당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에게 설득할 때 어떤 근거와 논증 방식을 동원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개인적 재능이 뛰어나고 과학지식을 많이 공부했더라도 현장의 기준을 활용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창의적 연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 분야의 창의적 연구자에 대한 심층적 통합 연구를 통해 얻어낸 칙센트미하이의 결론이 과학사학자나 기술사학자들의 개별 과학자와 기술자의 창의적 연구에 대해 수행한 연구의 결과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시 과학지식과 과학연구의 차이에 주목하는 토마스 쿤 이후의 최근 과학철학 연구 경향과도 연결된다.
이미 논쟁이 끝나 그 결과가 교과서에 정리된 과학지식은 개인이 자신의 지적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그 내용을 배우면 된다. 이와 달리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경쟁 연구자들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행되는 과학연구는 개인적 능력이나 노력을 넘어선 문화적 유산과 이종적 자원(heterogeneous resources)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결국 어떤 연구결과가 지식의 보고에 포함시킬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현장’에서 결정된다.
그렇기에 ‘창의적’ 연구의 기준은 개별 학문 연구의 ‘현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준을 습득하는 일은 단순히 관련 분야의 교과서나 논문을 열심히 읽고 이해하여 적용하는 것을 넘어선다. 결국 <창의성의 즐거움>은 과학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능이나 풍부한 지원만이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 문화와 전통이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흥미로운 사례연구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개도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노혜숙 옮김, <창의성의 즐거움>, 북로드, 20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