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중앙일보] 염치

FERRIMAN 2014. 3. 15. 18:06

[분수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염치가 없다니 …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양선희
논설위원
“어째서 우리나라는 공부 잘하고 잘난 사람들이 이렇게 염치가 없는 걸까요? 염치를 가르치는 시험 과목이 없기 때문일까요?”

최근 한 지인이 의사들의 진료 거부를 보며 한 말 때문에 염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염치(廉恥).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 말이 요즘 트렌드와 동떨어지게 들리는 건 사실이다. 요즘은 직설적이고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솔직한 태도가 칭송받는다. 체면은 다 내던져버린 천송이(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주인공)가 중국에서까지 대박을 친 것처럼. 게다가 항간의 속설처럼 염치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한데 옛말에 사람은 창고가 차면 예절을 알고 옷과 양식이 풍족하면 영광과 치욕을 안다고 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예의염치가 절로 생긴다는 것이다. 춘추시대 성공한 정치가인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한 말이다. 예(禮)·의(義)·염(廉)·치(恥)는 관중이 나라를 지탱하는 네 개의 근간(사유·四維)으로 꼽은 것이다. 이 중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고, 둘이 없으면 위태로워지고,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넷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나라를 지키는 법도는 사유를 닦는 데 있다고도 했다. 알고 보면 염치는 이렇게 국가 존망을 가르는 주요 덕목이다.

 하지만 관중의 예견은 틀렸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선 그렇다. 요즘 의사·변호사·서울대 성악과 교수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 혜택 받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풍족하다고 염치를 알 거라는 그의 기대는 순진했다. 의사들은 원격진료와 의료법인 영리자회사에 반대하며 진료 거부 투쟁을 한다. 환자 이익을 논하지만 일반인 눈엔 결국 자기 집단 이익 극대화를 위해 환자를 돌보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환자가 의사 이익 실현을 위한 인질이 되란 말이냐는 자괴감도 든다. 17일부터 전공의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근무한단다.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환자들 앞에 검은 리본 달고 나타나는 의사라….

 지난달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 윤리장전을 개정하면서 성공보수를 미리 받지 못하도록 한 조항 등을 삭제해 비난을 자초했다. 그 좋은 머리를 ‘더 많이 더 편히’ 버는 데 쓰는 그들 사이에 염치가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파벌싸움에 교수 충원도 못하고, 성추행·협박전화 등 막장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엮어낸 서울대 성악과 상황은 보고 있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다.

 트렌드가 어떻든 우리는 지식인들이 공익을 위해 고민하고 기여할 것이라고, 또 자기가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몽니를 부리는 행동을 삼가는 염치 정도는 있을 거라 기대한다. 심지어 천방지축 천송이도 이해관계 앞에선 쿨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사유는 몇 개나 흔들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누가 이를 흔들고 있는가.

양선희 논설위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