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킹 누구냐 GE·지멘스 100년 전쟁 파리서 결판난다
똑똑한 금요일 - 프랑스 알스톰 인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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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구글이나 애플의 미래를 보고 싶다면 두 기업의 진화과정을 보라.”
비즈니스 역사가인 테리 거비시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독일 지멘스를 두고 한 말이다. 두 회사는 19세기 발명가이자 벤처기업인 토머스 에디슨과 베르너 지멘스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회사는 서로 때론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론 서로를 벤치마킹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운명적인 외길에서 마주 섰다.
GE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이멀트(58)와 지멘스 CEO인 조 카이저(57)는 요즘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자주 오른다.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처지가 아니다. 회사의 명운을 건 승부가 진행되고 있어서다. 둘은 프랑스 제조업 상징인 알스톰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로이터·블룸버그통신 등은 최근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이멀트와 카이저의 운명뿐 아니라 GE와 지멘스의 미래가 달린 빅딜이 진행 중”이라며 “그 결과가 글로벌 제조업체 지형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글로벌 제조업체에서 GE와 지멘스는 1, 2위다. 지멘스가 알스톰을 차지하면 순위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인수전은 가격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얻어야 하는 상대가 알스톰의 주주와 경영진만이 아니어서다. 알스톰 뒤엔 프랑스 정부가 버티고 있다. 알스톰이 프랑스 자존심인 고속열차 테제베(TGV)를 생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기 때 정부의 구제금융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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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의 위력은 이미 확인됐다. 이멀트는 알스톰 발전 터빈 등 에너지 부문을 135억 달러(약 14조원)에 사겠다고 정식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6일 GE 제안에 반대했다. 그 바람에 먼저 가격을 제시해 기선을 제압하려던 이멀트의 의도가 무산됐다. 지멘스의 카이저에게도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뒤늦게 인수전에 뛰어든 카이저는 알스톰의 자산과 부채를 꼼꼼히 살펴본 뒤 GE와는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지멘스의 고속열차 부문과 알스톰의 발전부문을 맞바꾸고 차액만 현찰로 결제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지멘스는 발전부문에, 알스톰은 고속열차에 집중하자는 얘기다. 테제베를 내놓는 게 싫었던 올랑드 대통령으로선 솔깃한 제안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알스톰 인수전의 게임방식이 바뀌는 계기”라고 했다. GE가 칼자루를 쥐었던 인수전이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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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는 “이멀트와 카이저가 매출과 순이익의 정체 현상을 돌파할 승부수를 짜내다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바로 에너지 분야 확장이다. 발전 터빈, 신재생에너지 생산설비 등을 생산하는 곳이다.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 사업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엔 두 경영자의 개인적인 야망도 섞여 있다. 이멀트는 전임인 잭 웰치의 흔적(금융부문)을 지우고 싶어 한다. 웰치가 키워놓은 GE파이낸스 부문은 지난해까지도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9%나 됐다. NYT는 최근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이멀트가 2001년 취임 이후 1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웰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알스톰 에너지 부문을 사들여 이멀트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멀트가 GE 역사상 최대 M&A인 알스톰 인수를 추진한 속내다.
카이저도 비슷한 처지다. 그는 지난해 GE 출신 피터 뢰셔 CEO가 전격적으로 퇴진하면서 지멘스 사령탑에 올랐다. 당시 뢰셔는 실적부진과 신흥국 고객에 대한 뇌물 지급을 책임지고 물러났다. 카이저로선 구원투수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이다. 로이터는 “카이저가 에너지 부문을 강화해 매출액 기준 순이익 비율을 GE와 같은 10% 수준으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카이저는 GE 웰치가 즐겨 쓰던 사업부문 분리 매각을 단행하고 있다. 7일(현지시간)엔 “경영진과 관리직을 축소해 조직을 슬림화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GE의 이멀트는 금융부문을 축소하면서 제조업에 집중한 지멘스를 모델로 삼았다. ‘경쟁하는 기업들은 서로 닮는다’는 가설이 입증된 셈이다.
두 회사의 성장 과정도 마찬가지다. 애초 GE와 지멘스는 각각 전구와 전신장비를 생산하는 벤처기업으로 출발했다. 초기 사업부문의 초과 이익이 줄어들자 JP모건 등 거대 투자은행이 개입했다. 두 회사가 M&A를 통해 사업부문을 다각화하면서 비용을 절감하고 순이익을 늘리는 전략을 추구하게 된 계기였다. 그 과정에서 GE와 지멘스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상대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했다. 지금 두 회사의 비즈니스 포트폴리오가 80% 정도 일치하는 까닭이다.
GE와 지멘스의 치열한 경쟁을 보며 미소 짓는 쪽이 있다. 알스톰과 프랑스 정부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알스톰 값이 오를 수 있어서다. 전형적인 매도자 시장(Seller’s Market)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알스톰 경영진과 프랑스 정부의 의견차도 변수가 될 전망이다. 알스톰 CEO인 패트릭 크론(61)은 좌파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프랑스 정부가 GE 제안을 퇴짜 놓자 크론이 마뜩잖아 했다”고 전했다.
사실 크론은 M&A 움직임이 언론에 공개되기 전부터 이멀트와 접촉했다. 인수가격 등을 놓고 사실상 의견일치를 봤다는 게 외신들의 전언이다. 반면 올랑드 대통령은 국가적 자존심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테제베 사업부문을 유지·강화하고 싶어 한다. ‘고속열차 사업부문을 알스톰에 넘겨주겠다’는 지멘스 제안이 그에게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알스톰 인수전이 비즈니스를 뛰어넘어 미국-독일-프랑스 간의 정치경제 이슈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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