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누가 메르스에 돌을 던지는가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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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밝은 일본의 에도 막부는 달랐다. 기독교를 체제 위협으로 느껴 쇄국노선을 취했지만 선교를 하지 않는 네덜란드 상인은 예외였다.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상관(商館)을 만들어 서양의 첨단 과학과 항해·조선 기술을 익혔다. 난학(蘭學)은 일본 근대화의 동력이었다. 일본은 17세기 개명(開明)의 힘으로 19세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거푸 승리했을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일본에 7년간 유린당한 것도 모자라 20세기에는 아예 식민지 노예가 돼야 했다.
중동산 낙타 한 마리 없는 대한민국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의 폭격을 맞고 있다. 격리자가 5000명을 훌쩍 넘고, 병원이 폐쇄되면서 무능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보면 역설적으로 고장 난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수술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모든 생명은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잊고 있던 절대 진리를 메르스가 속삭인 것이다. 이대로 가면 공멸한다는 각성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우리는 세월호 비극에도 불구하고 돈보다 생명이 존중받는 성숙한 시민의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퇴행의 순간에 국가가 나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메르스가 다시 폭로한 것이다. 21세기의 메르스는 17세기 하멜이 그랬듯이 대한민국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감염병과 싸우는 것은 불확실성과 싸우는 것이다.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정치적 리더십이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소통이 절실하지만 이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대통령은 첫 확진 환자가 발생한 지 엿새 만에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의 대면보고를 받았다.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 직후 7시간 동안 대통령 대면보고가 없었던 장면을 떠올린다. 메르스 3차 감염자가 발생해 온 나라에 비상이 걸렸던 날 대통령은 지방의 창조경제혁신센터로 달려갔다. 급할 것 없는 12번째 출범식에서 활짝 웃는 사진을 찍었다. 국민은 도대체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전염병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질병관리본부에는 변변한 전문 인력이 없다. 역학조사관이 34명인데 정식 직원은 둘뿐이고 나머지는 공중보건의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전병율 연세대 교수는 “역학조사를 나가면 군의관이 뭘 알겠느냐고 우습게 본다”며 “날 빠진 칼을 주고 어떻게 전쟁을 하라는 건가”라고 울분을 토했다. 대한민국의 작동 시스템은 정상이 아니다.
메르스의 공포는 세월호의 슬픔보다 강력하다. 세월호는 타인의 고통을 슬퍼하는 감정이지만 메르스는 일상 속에서 나와 가족의 생명을 노리는 현실이다. 그런데 정부의 고장 난 시스템은 메르스의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상실했다. 추락하는 경제도, 대통령 지지율도 날개가 없다.
이 나라에선 어떤 각성도, 구조개혁도 불가능하다고 많은 사람이 한탄해 왔다. 오죽하면 외환위기 수준의 충격이 있어야 변할 것이라고도 했다. 국가 부도의 위기를 불러온 외환위기는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를 가져왔다. 분열되면 나라가 망할 판이어서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뭉쳤다. 금을 모으자면 금을 모았고, 어렵다는 노동개혁과 기업 구조조정도 이뤄졌다. 그래서 외환위기도 극복하고 경제의 체질도 튼튼해졌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역설이다.
메르스의 충격은 작동을 멈춘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꿀 것을 명령하고 있다. 무능한 정부의 독주가 아니라 다수 국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소통형 민주주의 방식의 국정 운영이 절실하다. 이젠 정부도, 기업도, 노조도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메르스는 고장 난 대한민국 시스템을 향해 지금이 달라져야 할 마지막 기회라고 소리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은 350년 전 잠결에 하멜을 떠나보내고 무방비 상태로 근대를 맞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노예 36년’의 후유증은 지금도 우리 영혼의 자율신경을 수시로 마비시키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메르스를 저주하고, 돌을 던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메르스가 위기의 공동체에 보내는 최후의 경고를 외면하면 미래는 없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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