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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한민국 사고공화국, 위험, 안전,

FERRIMAN 2018. 1. 28. 16:25

[이훈범의 시시각각] 이 땅에서 살기 힘듭니다

입력 2018-01-02 02:01:40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배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시내버스를 탈 때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 날벼락처럼 크레인이 날아들지 모릅니다. 타워크레인이 보이는 공사장 근처엔 얼씬거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지난달에만 세 번의 사고가 있었고, 지난해에만 1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달라진 게 없으니 또 다른 사고가 예정돼 있다고 보는 게 안전합니다. 헬스클럽이나 목욕탕에 갈 때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언제 불이 날지 모릅니다. 불법 주차 차량들로 가득한 골목 안 건물엔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잠겨 있거나 창고로 쓰이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니 알아둘 것도 많습니다. 건물이 ‘드라이비트’ 공법을 사용했는지, 외장재로 ‘샌드위치 패널’을 붙였는지 따져야 합니다. 화재가 나 불을 끌 때도 ‘백드래프트’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필로티’ 구조의 건축물이 화재에도 취약하다는 사실을 이번에 배웠습니다. 타워크레인의 안전검사 통과율이 94%가 된다는 사실도 알아두는 게 위험을 상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몰라도 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게 힘겹지만, 세월호의 ‘평형수’처럼 알래야 알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쉽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더 힘들고 더 어려운 이유가 또 있습니다. 각각의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나와 다른 생각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견고한 진영논리 말입니다. 똑같은 사안에 보수와 진보 양측이 정반대 해석을 내놓습니다. 때로는 자기 진영에 유리하도록, 때로는 반대 진영을 욕보이려고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기도 합니다. 한 주장 밑에는 반대 진영의 욕설과 저주가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끝까지 읽지도 않고 분노하느라 제 편에 욕설을 퍼붓는 ‘난독증 환자’도 드물지 않습니다. 소셜미디어로 살갑게 대화하다가도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을 거드는 발언이 나오면 바로 관계를 끊습니다.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영문 모를 보복을 당합니다.

이 땅에서 살기가 갈수록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혹시 우리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살기가 힘들고 어려운 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놓고 다투는 거겠지요. 하지만 싸우기만 할 뿐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닌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검사를 철저히 하고, 돈이 들더라도 불에 타지 않고 유독가스를 내뿜지 않는 내·외장재를 쓰며, 비상구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금방 찾을 수 있게 안내하는 것 말입니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토론해야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자기만 옳다고 목청만 높이고 있는 건 아니냐는 말입니다.

샤를 드골이 대독(對獨) 항쟁을 지휘할 때 유대인이자 인민전선내각에서 총리 비서실장을 지냈던 조르주 보리라는 인물도 참여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에게 드골이 말했습니다. "난 보리에게서 단 한 가지만 보인다네. 해방을 위해 싸우려고 52세의 나이에 참전한 프랑스인이라는 점 말일세. 난 어떤 부류든,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졌든 두 종류의 프랑스 국민만 있다고 생각하네.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지. 보리는 전자의 경우라네."

새해에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려고 다투기에 앞서 자기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보다 안전해지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저것 어려운 용어를 외울 필요 없는 쉬운 세상이 되는 건 덤입니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