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중앙일보] 비난사회

FERRIMAN 2018. 7. 11. 22:50

[마음읽기] 비난 사회

입력 2018-07-04 01:19:12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독일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무사했을까?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비난 폭탄을 과연 국가대표와 코치진이 이겨낼 수 있었을까? 멕시코 국민들이 ‘꼬레아’를 연호하는 장면과 독일의 탈락이 확정되는 순간에 열광하는 영국 팬들의 뜻밖의 모습이 우리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지 않았더라면, 16강에 진출하고도 ‘비 매너’ 게임을 했다고 비난받는 일본이 없었더라면, 우리 국가대표팀을 향해 몰아친 비난의 광풍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특정 선수를 향한 비난과 그 비난을 비난하는 혼동의 비난전이 잦아든 지금, 각자의 비난을 정당화하고 예선 탈락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한 심리적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특정 선수를 비난한 것이 우리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16강전에서 핸들링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제공했던 스페인 수비수가 비난받고 있다는 소식을 이용해 우리 선수를 향한 자신의 비난이 인류 보편적임을 상기시킨다. 개인은 개인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월드컵 역사상 독일의 첫 조별 예선 탈락’을 연일 부각시켜서 우리의 패배를 희석시키고 있다. 결정적으로 메시의 아르헨티나와 호날두의 포르투갈이 동반 탈락해 우리의 평정심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치유 과정에도 불구하고, 언제고 다시 등장할 것 같은 비난 사회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난다. 누가 먼저 비난하는지를 놓고 경쟁이라도 하듯 비난을 한다. 비난받아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경우에도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차별과 폭력의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비난에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왜 비난하는가?

우리는 왜 비난이 적절치 않은 상황에서도 비난하는가?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비난은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 적절한 것과 적절치 않은 것을 구분하는 개인의 잣대와 관련이 있다. 모든 개인은 어떤 이유로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도덕의 기초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비난의 고통을 타인에게 안기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쳤는지를 도덕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국가대표가 자신에게 준 실질적 피해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의 플레이에 실망하기야 하겠지만 그를 공격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가한 직접적 피해가 아니라, 조직에 대한 충성과 배신을 잣대로 삼는 사람들은 누군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우리’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국가대표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국가’의 대표로만 보면 그들은 늘 비난의 잠재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을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고유한 개인으로 보느냐, 아니면 집단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집단의 대표’로 보느냐에 따라 비난의 수위가 달라진다. 우리가 비인기 종목에 참가했던 평창올림픽 선수들을 메달 획득과 상관없이 열렬히 응원했던 이유는 그들을 국가의 대표로 보기 이전에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젊은이로 보았기 때문이다. 출전 기회가 하루아침에 날아간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런 결정을 내린 국가에 분노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일한 생각을 모두에게 품어야 하지 않을까.

공정성에 대한 심리적 욕구 또한 비난의 원천이 된다. 사람들은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좋은 일은 그 일을 누릴 만한 사람에게 일어나고, 나쁜 일은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사람에게 일어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게임에 진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폭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배의 고통이 가장 심할 선수와 폭력의 고통이 가장 심할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행위다. 실수한 사람, 실패한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를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일도 없다.

그런데 사회가 공정하지 못할수록 공정성에 대한 심리적 욕구가 강해진다. 그런 사회일수록 실수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위로하기보다는 비난한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모두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욱더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실수를 용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로를 더 비난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고작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남을 비난하는 것은 격이 없는 행위다. 연구를 보면 월드컵 게임에서 승리한 후에 누리는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게임에서 지고 난 후의 나쁜 감정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며칠이면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미 그렇지 않은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타인의 마음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내는 비난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반복하기는 싫은 격이 없는 행위다. 우리는 고작 그 정도의 사람들이 아니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