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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멘토 자료, 종교

FERRIMAN 2019. 2. 23. 20:51

[정재승 칼럼] 인도에서 종교를 생각하다

입력 2019-02-23 00:20:00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세계최대 종교축제인 쿰브멜라를 관찰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 쿰브멜라는 힌두교인들이 성스러운 강가를 찾아가 목욕을 하면서 죄를 씻고 치유를 얻는 축제다. 올해는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알라하바드에서 열렸다. 한달 동안 진행되는 이 행사는 최대 1억2천만 명이 참석하는데, 하루에 2천만 명이 갠지스 강가에 모여 목욕을 하는 대규모 축제다.

2천만 명이 강가에 모여 목욕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그 자체로도 장관이지만, 그들이 강가에 모여 줄을 서서 물에 몸을 적시고 마시는 모습은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강물은 극도로 더럽고 주변에 오물이 발 디딜 틈 없이 산재해 있어 오히려 아픈 자들에게 해롭다. 그러나 이 물에 몸을 씻고 조금씩 마시기도 하는 광경은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한다.

그 답에 대한 실마리는 알라하바드에서 130㎞ 정도 떨어진 바라나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라나시는 성스러운 죽음으로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인도사람들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길 고대한다. 이곳의 골목길에 서 있으면, 끊임없이 시체들의 행렬을 보게 된다. 시체를 곱게 싸서 대나무 들것 위에 올린 후, 이를 짊어진 예닐곱 명의 청년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화장터로 옮긴다.

잠시 갠지스 강에 시체를 담그고 정성스럽게 씻은 후에, 그것을 장작 위에 얹어 불을 붙일 준비를 한다. 3,500년 동안 한번도 꺼진 적이 없다는 장작으로부터 불을 옮겨와, 두 시간 가량 시체를 태운다. 그러면 대부분의 뼈들은 고스란히 하얀 재로 변한다. 여성의 골반뼈나 남성의 가슴뼈처럼 큼지막한 뼈들은 타지 않아 가족에게 인도된다. 그들은 알라하바드로 가서 갠지스 강에 재를 뿌리고 남은 뼈는 간직한다.

윤회를 믿는 힌두교에서는 죽음을 생의 단절로 보지 않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작별이자 출발로 여긴다. 먼 길 떠나는 영혼을 위해 시체를 단정하게 목욕시키고 새옷을 입힌 후에, 다음 생으로 먼 여행을 떠나보내는 작별행사를 이곳 바라나시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곳에 오게 만들고, 윤회와 환생을 믿으며 다음 생으로 떠나는 준비를 하게 했을까.

놀랍게도 막상 이 자리에 서서 장례절차를 바라보니, 오싹하기보다 차라리 성스러웠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이 시체에 입을 맞추고 두 시간 넘게 하염없이 시체가 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니, 그들에게 이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감당하기 위한 자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생명체의 소멸은 그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실이며, 남아있는 자들이 그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잃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리였다. 그것이 13억7천만 인도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종교의 역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도에서 평범한 시민들이나 수행자, 종교지도자를 만날 때마다 ‘당신들의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무엇이냐’를 따져 묻곤 했다. ‘명상을 장기간 해보면 안다. 그 체험이 곧 증거다’처럼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더없이 모호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신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가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지극히 과학자스러운 질문으로서 말이다. 다른 어떠한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만이 종교적인 행동을 집단적으로 지속한다는 점에서, 그 해답이 ‘호모 사피엔스의 유별난 뇌’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로서의 종교를 통해 인간은 집단 협력을 이끌어왔고, 그것이 우리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대형유인원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지난 3천년간, 아니 그 이전부터 종교는 인류 문명의 추동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더없이 발달한 현대 문명 속에서 상대적인 빈곤이 심각한 인도를 보니, 이곳에서는 종교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도 비참하고 피폐한 환경,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움막이나 허름한 벽돌집을 짓고 살아야하는 삶, 사람이나 소, 개의 인분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널려져 있고, 동물들조차 먹을 것이 없어 말랐고 피부병에 시달리는 곳. 이런 곳이라면, 윤회와 내세를 믿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 삶을 버텨내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깊은 인도철학과 종교를 통해 정신적으로 더없이 고양된 그들의 삶의 태도가 그들을 20년 후에도 이렇게 살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해졌다. ‘종교란 우리에게 진정한 위안인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물질주의자인 과학자에게 엄습해왔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