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석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남북한인프라특별위원장이 29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 특별세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인프라(infrastructure)는 경제활동의 토대가 되는 기반 시설이다. 철도·도로와 공항·항만 같은 교통망을 중심으로 통신·상하수도·에너지 관련 설비가 망라된다. 최근 들어서는 문화·교육 시설이나 의료·복지 시스템으로까지 개념이 확장되는 경향도 보이지만, 전통적 요소로서의 인프라 중요성은 여전하다. 같은 인프라를 공유하고 연결된 체계로 이를 활용하는 건 동일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의미도 있다. 남북한이 인프라 협력을 통해 북한의 낙후된 사회 기반시설을 개선하고 교통·통신망 등을 하나로 이으려는 것도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복원에 인프라 건설이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지난 29일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에서 열린 ‘한반도 번영을 위한 인프라 협력’ 특별세션 현장을 찾아 그 가능성을 짚어봤다.
"솔직히 우리 교통이 불비(不備)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다." 지난해 4월 판문점 첫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북한 쪽을 거쳐 백두산을 가보고 싶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김정은이 북한의 열악한 교통 사정을 고백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고속철도 얘기를 꺼냈다. 그는 "평창올림픽에 갔다 온 분들이 말하는데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라고 말한 뒤 "남측의 이런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시면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고 했다. 두 달 전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특사 자격으로 방문한 여동생 김여정으로부터 서울~강릉 간 고속철에 대한 생생한 보고를 들은 걸 토대로 한 얘기로 보인다.
북한의 열악한 인프라에 대한 우려와 대책 마련 필요성을 주문하는 목소리는 제주포럼 특별세션에서도 쏟아졌다. 주제발표를 맡은 김병석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 연구위원(남북한인프라 특별위원장)은 "교통과 상하수도는 물론 전반적인 인프라 요소에서 남북한의 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어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될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따른 대북제재가 진행되고 있지만 해제 이후에 대비한 단계별 인프라 협력사업(가칭 ‘한반도인프라 마스터플랜’)을 구상해 실행에 옮겨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제재 해제 이전이라도 북한 인프라 공동조사와 제도·기준 마련, 특화기술 공동개발 같은 채비를 하자는 취지다.
김 위원장이 ‘국민참여형’ 건설을 제안한 DMZ를 가로지르는 ‘평화의 다리’ 조감도. [사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도로의 경우 북한은 총연장이 2만6178㎞에 그쳐 11만 91㎞인 우리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주행속도가 시속 50㎞ 이하에 머물렀고, 2.4m보다 좁은 일차선 도로의 비중이 43.5%에 달했다. 철도는 연장이 5287㎞로 남한의 4078㎞에 비해 긴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노선과 철도 시설물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는 등 노후화가 심각했다. 평균 운행 속도도 시속 40㎞ 수준(산악지역은 시속 15㎞)에 그쳐 평양에서 북부 지역 혜산으로 가는 구간 400㎞ 운행에 22시간이 소요된다. 말 그대로 ‘속 빈 강정’에 그쳤다는 얘기다.
독일 연방건설청(BBR) 산하 도시공간연구소의 프로젝트 책임자인 베른트 부테 박사는 주제발표에서 "통일 이전 동서독은 국경에 인접할수록 교통망이 촘촘하지 못했고, 양 지역을 잇는 도로 10개와 철도 건널목 8개가 전부였다"고 지적했다. 부테 박사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유럽 국가 간 국경개방으로 인해 교통 흐름의 주류였던 남북 방향 교통 외에 동서를 잇는 노선의 교통 흐름이 증가했다"면서 "이로 인해 동독 지역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가 문제가 됐고, 특히 동서 연결 구간에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급증하는 문제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결국 도로 여건을 개선하고 서유럽 기준에 부합하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동독지역의 고속도로를 완전히 새로 건설할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것이다. 부테 박사는 "독일도 갑작스레 통일이 돼버렸다"며 "한국은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하길 바라며,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그동안 준비해온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개회사를 하는 한승헌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 [사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남북 경협에 종사해온 전문가들은 토론에서 북한의 열악한 인프라 여건 개선이 남북 간 협력과 우리 기업의 대북 진출에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육재희 한라건설 전무는 "금강산 관광 초기 현대아산은 장전항에 접안부두를 직접 건설하고 도로 공사를 새로 하고 발전소를 지었다"며 "초기부터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적자는 불을 보듯 뻔했다"고 말했다. 육 전무는 "이런 뼈아픈 경험 때문에 개성공단 건설 때는 전력과 수도·오폐수 등이 정부 지원 아래 해결됐다"고 강조했다. 결국 인프라 구조에 따라 대북 비즈니스의 여건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한다 해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육 전무의 지적이다. 육 전무는 "남북인프라협력개발공사(가칭) 같은 기구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합의를 통해 철도·도로와 관광특구 같은 인프라 관련 논의에 진전을 이뤄놓은 상황"이라며 "남북관계가 다소 주춤하는 듯한 현시점에서 재원조달과 거버넌스(추진 체계) 구축에 꼼꼼한 점검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중국이 일대일로를 추진하면서 철도·도로와 항공로·가스 등 6대 인프라의 연결에 공을 들이고 있다"면서 "북한이 인프라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협력을 긴밀히 하는 상황이라 우리 기업이 중국에 선수를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당국의 입장도 민간 전문가 그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널로 나온 하대성 국토교통부 국토정책관은 "국토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어떻게 북한을 한반도 경제권으로 묶어낼 것인가 하는 걸 고민하다 보면 결론은 늘 인프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도로·철도가 선봉장이 돼서 남북협력의 기초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 정책관은 "솔직히 지난해는 (남북 당국 일정에 바빠서) 민간과 소통할 여유가 없었다"며 "이제 당국과 민간의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토론 사회를 맡은 이종세 대한토목학회장은 "제주만 섬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섬 아닌 섬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분단으로 본의 아니게 섬이 돼버린 대한민국을 육지로 만드는 그랜드플랜을 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북한과 하나의 교통·물류망을 구축해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대륙으로 나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날 세션에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측은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의 도라산전망대에서 비무장지대(DMZ) 임진강을 가로질러 북측으로 연결되는 ‘평화의 다리’(가칭) 건설 구상을 제안했다. 정부 당국이 아니라 남북한과 국제사회의 민간이 건설 비용을 모아 지구촌 마지막 냉전과 분단의 현장에 한반도 평화의 가교를 마련한다는 취지다. 김병석 연구위원은 "교량 1mm 건설에 100달러의 비용을 들어가는 걸 고려할 때 모두 100만명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제주포럼 인프라 특별세션을 주관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지난해 1월 한승헌 원장 부임 직후 통일북방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올해는 이를 특별위원회로 확대해 인프라 분야 남북협력과 대북 진출을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업계와 전문가·시민 등이 참여하는 ‘한반도 인프라 포럼’의 발족도 준비 중이다. 한 원장은 "남북 경협과 평화에 대한 염원은 커지고 있지만 아직은 이상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건설·인프라 분야 남북협력의 허브 역할을 우리 연구원이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서귀포=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