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중앙일보] 멘토링 자료, 인성, 너그러움, 배려

FERRIMAN 2019. 6. 28. 20:20

[삶의 향기] 너그러움

입력 2019-06-25 00:08:29
내가 홍차를 마실 때 커피 마시는 사람이 나에게 커피를 마시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나의 입맛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외식하러 갈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겠니?"라고 묻는다. 그들의 입맛을 배려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머니 사정에 문제가 없고 아이들의 식습관 걱정이 없다면 그들의 희망을 들어준다. 입맛의 세계는 너그럽다.

예술에서는 대체로 입맛의 원리가 통한다. 내가 국악을 좋아한다고 클래식 팬이 나를 말리지 않고 어떤 이가 BTS를 싫어한다고 우리가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음악을 알고 즐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고금동서 음악의 백미편을 골라 골고루 감상을 시키곤 했다. 더 많이 알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의 세상은 그만큼 넓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더 너그럽지 않겠는가?

이 너그러움의 영역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았다. 스탈린시대의 소비에트 정권은 난해한 예술들을 싫어했고 그렇게 평가된 예술가들은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심하면 숙청을 당했다. 나치 시대에는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을 낭만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예술을 탄압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의 유신 시절이 그랬다. 퇴폐적인 가사, 저속한 창법, 불신감을 조장하는 노래를 방송에서 금지했다. ‘왜 불러’ ‘아침이슬’ 등이 그런 노래였다. 하긴 그 시대에는 남자들이 길게 머리를 기르고 다니거나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도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금지했다.

입맛의 세계가 너그럽다고 하지만 어떤 입맛이나 다 동등한 것은 아니다. 같은 입맛에도 수준이 있다. 브람스도 좋고 판소리도 좋지만, 또 둘 다 좋아할 수도 있지만 더 깊이 있는 브람스 연주가 있고 더 구성진 판소리가 있다. 그래서 그런 연주가를 가려내기 위한 콩쿠르가 있다. 세계적인 콩쿠르의 본선 마지막에 가면 보석 같은 존재들만 남아 심사위원들은 그중에서 최고를 골라내야 한다. 심미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심미안들도 때로 충돌한다. 한 심사위원이 최고점을 준 예술가를 다른 사람이 최하점을 주는 일이 적지 않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산초가 말한다. "우리 가문에는 유명한 포도주 감정가 두 사람이 있었어요. 한 번은 이 두 분이 한 술통의 포도주를 감정했는데 한 분이 먼저 혀로 포도주 맛을 보고 약간 쇠맛이 난다고 했어요. 두 번째 분은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산양가죽 냄새가 조금 난다고 했지요. 술통 주인은 두 사람의 감정에 코웃음 쳤지만 나중에 술통을 다 비우고 보니까 산양가죽 끈이 달린 열쇠가 그 바닥에 있었답니다." 두 사람이 다 최고의 입맛을 가졌지만 역시 모든 것을 다 판단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에는 다시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요즈음 정치권의 공방을 보면 단순하고 격렬하고 배타적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다. 적이 하는 일은 나쁜 짓이고 우리가 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양보와 관용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요구하지 자기가 먼저 하는 경우는 없다. 이러니 사람들은 정치 얘기를 꺼린다. 세상 돌아가는 온갖 얘기를 나누는 단톡방이지만 정치 관련 얘기는 금기다. 하다 보면 단순, 격렬, 배타적인 어조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너그러움이 없다.

한 나라를 움직여가는 일은 포도주를 맛보는 일과 다르다. 포도주에 대한 판단이야 틀려도 사람과 나라를 망치지 않지만 나라의 일을 판단하는 일은 구성원 모두의 흥망과 연결되어있다. 그만큼 엄중하다. 실은 그래서 그만큼 더 판단이 어렵다. 한 통의 포도주를 놓고 최고 고수들이 ‘쇠맛’ ‘가죽냄새’로 의견이 갈렸듯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사건건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의견이 갈린다. 당연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둘 다 맞을지도 모른다. ‘산양가죽 끈이 달린 열쇠’의 경우처럼.

그렇다고 해서 양비론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의견에 대해 인색한 양비론이야말로 가장 너그럽지 않다. 필요한 것은 온갖 의견이 나름대로 경청 되는 너그러운 분위기이다. 너그러워야 섬세한 입맛이 자라나고, 섬세한 입맛이 자라나야 입맛의 고수들도 나타나고, 입맛의 고수가 나타나야 격조 높은 문화가 생산된다.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격하는, 그러다가 유리하다 싶으면 당리당략에 따라 자신의 입맛을 바꾸는 패거리 문화는 천박한 문화, 선동적인 문화, 평화를 지키지 못하는 문화를 낳을 뿐이다. 그런 나라의 앞날이 어떨지는 뻔하지 않은가? 너그럽지 않으면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가 아니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