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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과학영재, 천재소년, 김웅용

FERRIMAN 2020. 11. 2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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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소년' 김웅용 교수, "대학 동기들은 술, 나는 우유마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9.29 17:38

‘김웅용’ [사진 KBS2 ‘여유만만’ 캡처]

김웅용 교수가 천재소년이라 불렸던 어린시절에 대해 언급했다.
29일 오전 방송된 KBS2 ‘여유만만’에는 IQ 210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천재소년 김웅용 교수가 출연해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김웅용 교수는 높은 IQ 때문에 언론에 늘 노출됐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김웅용은 어려서부터 천재로 주목을 받았고, 5세의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5살에 대학에 입학한 김웅용은 우유를 먹을 나이였지만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에 김웅용은 “어린 시절에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던 기억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김웅용은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며 “다른 사람들은 천재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잘한다고 알고 있다. 나는 다 잘하는 것이 아니고 한 분야에 특출난 것이다. 수학을 남보다 조금 일찍 알았다”고 말했다.
김웅용은 “길눈이 어두운 나를 보고 사람들은 ‘천재가 길도 모르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천재라는 수식어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 날을 회상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천재소년 소리를 들었던 김웅용의 어린시절 일화들이 공개됐다. 김웅용은 8개월 때 장기 훈수를 둘 줄 알았고 1세에는 한글과 천자문을 모두 깨우쳤다. 특히 이날 방송에서는 김웅용이 쓴 붓글씨가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중앙일보

‘김웅용’ [사진 KBS2 ‘여유만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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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뉴스 2020.7.26]

신한대학교 김웅용 교수가 24일 의정부시에 책 1만5천여 권을 기증했다.

김웅용 교수는 “노벨상 수상 등 화려한 목표도 중요하지만 이웃들과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며 “의정부시가 스책 읽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어 그동안 소장했던 도서를 의정부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기증하게 됐다”고 전했다.

안병용 의정부시장은 “세계적인 기대와 관심을 받으며 최연소 미국 대학원생이 되고, 10세에 미항공우주국 나사에 입사해 한국인의 위상을 높였던 김웅용 교수님의 의정부시 방문을 환영한다”며 “소중한 책을 기증해주셔서 감사드리며, 기증해주신 책은 45만 의정부시민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김웅용 교수는 1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익혔고 4세에 미적분해제 등 세계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10세에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항공우주국(NASA)에 입사했다. 16세에 귀국했다. 김 교수는 2014년부터 신한대학교 도시기반 부동산학을 강의하고 있다.

최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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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5.11. 21]

 

#'실패한 천재'라니…

"저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고 열심히 연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무슨 연유로 언론에서는 저를 '실패한 천재'라고 하나요."

1960년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천재소년' 김웅용씨(42)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런 하소연을 쏟아냈다. 특히 언론에 강한 불신과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최근에 또 한번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다름 아닌 8살 나이에 인하대에 입학한 송유근군을 언론이 보도하면서 김씨를 다시 언급했던 것.

김씨는 왜 자신이 실패한 천재냐고 반문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지금은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공학박사에 기술사이면서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 연세대와 충북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치수와 수리학 분야에서 9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저널에 발표하는 등 학문적 연구도 활발하다. 이러한 연구로 저명한 학자들이 오를 수 있는 국제인명사전 '후즈 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2006년판에도 등재될 예정이다. 그런데 왜 언론이나 사회에서는 툭하면 자신을 '실패한 천재'라는 낙인을 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김웅용씨는 그 누구보다 천재소년의 길을 걸었고, 지금은 수리학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다만 어린 시절 목표도 없이 이끌려 떠났던 미국 생활을 접고 처음부터 자신의 목표를 다시 세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선입견이 천재의 앞길을 막고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박사는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하면 과거의 '천재소년'이라는 이유로 기피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이제는 교수가 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더이상 지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10대, 불행했던 시절

8살에 시작된 미국 유학,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어린 나이에 홀로 된다는 것은 외로움을 넘어 두려움이었다. 매일 쳇바퀴처럼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연구소와 대학원 공부를 해야만 했다. 당초 미국 유학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나사(NASA)측의 초청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어진 연구과제…. 김박사는 "나사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수없이 몰려왔다"면서 "목표도 없이 나사측이 주는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지옥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컴퓨터 이용의 초기 단계여서 그가 하는 일은 결국 컴퓨터가 하는 일을 대신했던 것. 나사측에서는 '계산과 예측'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그의 재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목적'없이 이루어진 미국에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그냥 귀국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에게 보통아이들이 누리는 개구쟁이 시절의 10대는 없었다. '박제된 생활'속의 천재.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졸업장이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했던 것. 미국에서의 물리학 박사학위과정 수료도, 나사에서의 선임연구원 근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졸업장이 없으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김박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뒤늦게 찾은 보통사람의 행복

김박사는 미국에서 귀국한 78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두 인생을 살았다. 전공도 물리학에서 토목공학으로 바꾸었다. 또 서울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지방대를 택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방대에서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천재소년이 지방대에 들어갔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어요. 지방대가 뭐 어떻습니까."

그에게는 '간판'보다는 친구가 필요했고 보통사람들의 대인관계가 절실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맛본 대학생활은 그에게 숨통을 터주었다. 그는 어릴 적 누리지 못했던 친구들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 동아리란 동아리엔 모두 가입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우정,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눈물겹게 다가왔다.

영재는 '특별한 관심'을 준다고 해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영재나 천재에 대해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이들이 천재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 김박사는 "천재나 영재에 대해 '원숭이' 취급을 해서는 안된다"면서 "자신들의 잣대로 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인생은 고독하다지만, '천재소년' 김웅용씨가 살아온 지난 40여년간의 삶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독한 삶이었다. 이제라도 그를 향한 지나친 관심과 막연한 편견을 거두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김웅용이 걸어온 길

김웅용 박사는 서울에서 건국대 물리학과 교수인 김수선씨와 이화여대 의대교수인 류명현씨 사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응석받이로 지낼 나이인 5살때 이미 4개 국어를 구사하고, 6살때에는 일본 후지TV에 출연해 미적분을 풀어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IQ 210. 그는 1980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올랐다.

4살부터 7살때까지 청강생으로 한양대에서 물리학 공부를 했다. 그리고 8살때인 1970년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과정을 수료했다. 또 대학원에 다니면서 74년부터 5년동안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에게는 응석을 부려야 하는 어린 시절도, 한창 또래 아이들과 뛰어놀아야 하는 초등학교 시절도 없었다. 16살때인 78년 그는 8년여의 미국생활을 접고 나사측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돌연 귀국길에 올랐다. 김박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곳에서 계속 연구원으로 일했다면 아마도 자신은 자살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함께 놀 친구 한명 없었던 그에게 미국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는 말에 그는 "결혼도 하고 아들 둘을 두고 있는데, 요즘이야말로 행복하고 안정된 일상속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최효찬기자·사진 정지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