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중앙일보] 과학영재, 인재, 인재육성, 기술인재, 영재

FERRIMAN 2021. 4. 3. 10:48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과학기술인재 위기는 예견된 미래, 지금 대비해야

입력 2021-03-29 00:34:00

 

2016년이니 제법 시간이 지났다. 국내 한 정부출연연구소에서 국방용 무인기를 개발하다가 사고가 났다. 처음 시제기를 만들어 띄웠으나 센서문제로 곧바로 추락했다. 이후 예산을 담당하는 곳에서 수개월간 감사를 벌였고, 결국 시제기 제작과 관련된 연구원 5명이 손실비용 67억원을 나누어 개인배상을 하라는 황당한 조치가 내려졌다. 이 일이 언론에 알려졌을 때 과학기술계는 경악했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청년 과학 기술자들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가장 흔한 표현은 ‘빨리 로스쿨이나 의전, 아니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자’는 것이었고, 심하게는 ‘빨리 한국을 떠나자’였다. 다행히 여러 절차를 거쳐 개인 배상은 없던 일이 되었고, 관련 제도개선이 있었지만, 젊은 과학기술자들의 마음에는 깊은 트라우마가 새겨졌다. 

인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생각나는 일이 또 있다. 모 그룹에서 공들여 데려온 글로벌 기술인재가 2~3년을 못 버티고 떠나는 일이 허다했다. 인사팀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떠나는 인재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했다. 심지어 이직한다는 회사의 연봉이 현재보다 현저히 낮은데, 도대체 왜 떠나려는가. 대답은 대체로 한가지다. 웬만큼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는 과제만 수행하는 환경이 두렵단다. 도전적 시행착오의 기회가 없으면 성장할 수 없고, 이렇게 안주하다 보면, 글로벌 무대에서 하루하루 뒤처지게 된다는 확실한 논리다. 답답해 하는 인사책임자의 말을 듣다가 작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추격시대의 벤치마킹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회사 탓이지 인사팀 잘못이 아니라고. 

지난 10년 전부터 세계은행은 ‘중간소득함정’이라는 개념을 유행시켰다. 한 국가가 개도국 단계에서 고속성장을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성장이 멈추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중국 등 많은 중진국들의 관심을 끌었다. 뒤이어 이 정체현상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복잡한 경제성장 모형들이 다수 발표됐다. 핵심은 간단하다. 한 국가경제 내에 연구개발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부문이 있고, 단순 제조업처럼 선진국의 산업을 따라하는 전통적인 부문이 있다고 할 때, 새로운 것을 만드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지 않으면 성장 정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산업이 어느 정도 발전할 때까지는 선진국 산업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성장전략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굳이 그 복잡한 수식으로 증명까지 해야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이 주장은 성장 정체를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있다. 한마디로 첨단 산업을 열어갈 과학기술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한국산업의 미래성장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빈손에서 출발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첨단 반도체 산업을 어떻게 키워낼 수 있었을까. 알고 보면, 비밀이랄 것도 없다. 산업전문가들은 하나같이 70년대 초반부터 우수한 인재들이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반도체 산업으로 쏟아져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축적의 시간

 

과연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올해 국가공무원 9급 채용시험에만 19만 8000명이 지원했다. 라이선스로 보호받는 각종 직업군에 대한 선호 역시 식을 줄 모른다. 심지어 2019년도에는 해외유학생 숫자도 지난 10년 이래 가장 낮게 나타났다. 어렵게 영입된 해외 인재는 되돌아가기 바쁘고,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은 현지에 남고 싶어한다. 과학기술 인재의 배출 수 자체도 인구 감소에 따라 줄어들 전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출되는 석·박사급 기술인력의 실업률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 산업계가 도전적인 연구를 수용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거나, 글로벌 기술동향과 동떨어진 현재의 대학 체제 아래에서 배출되는 인력의 질이 만족스럽지 않은 탓이다. 과학기술 인재의 양과 질 모두에서 추세적 위험신호가 깜빡이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10년 뒤 선진국과 경쟁은 둘째치고 무엇보다 중국의 기술 굴기를 당해낼 수 없다. 한국이 중국보다 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가 6.7배 더 많고, 국민소득 대비 연구개발투자 금액의 비율이 2배가 넘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기술개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주택 보급률이나 인터넷 보급률과 달리 연구개발에서는 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가 아니라 연구원의 절대 숫자가 많아야 더 높은 기술을 달성할 수 있다. 중국은 한국보다 연구자의 절대 수가 4.3배 많다. 세계적으로 경쟁하고 있는 첨단분야는 뻔한데, 4배나 많은 사람이 달려들면 연구결과가 더 좋을 수밖에 없다. 연구개발비 총액도 우리보다 3.9배 많으니 우리가 겨우 한번 시도해 볼 것을 중국은 네 번 해볼 수 있다. 한국이 그나마 반도체 등 첨단분야에서 중국 대비 기술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먼저 출발해서 축적의 시간이 좀 더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라면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다. 

추세적 위험신호가 일찍 켜졌음에도 국가적 대응이 늦었던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구문제가 손꼽힌다. 1983년에 이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계출산율 2.1이 무너졌다. 그러나 ‘둘도 많다’는 식의 산아제한 정책은 계속됐고, 20년도 더 지난 2006년에 가서야 화들짝 놀란 듯 정책 방향이 출산율 회복으로 전환됐다. 그 결과 작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30만 명 미만의 신생아가 탄생했고, 연금 고갈, 대학 붕괴, 지방 소멸, 성장률 저하 등 여러 가지 국가적 난제가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됐다. 한국이 직면하게 될 과학기술 인재의 양적·질적 위기는 인구문제 만큼이나 확실하게 예견되는 미래다. 급한 일 보다 중요한 일을 중시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를 기르는 것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은 없다. 

과거 고도성장기의 기술인재들은 선진국을 정답으로 하여 성공적인 추격의 역사를 써낸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추격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선진국과 같은 눈높이에서 독창적 개념설계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독창적인 기술을 만들어내려면 추격시대의 관행과 달리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남들이 해보지 않던 개념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요한 기술인재의 모습과 키워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추격시대에는 산업현장에서 성실히 일할 수 있는 표준적인 인력을 많이 키워내는 것이 중요했다. 선도국가를 지향하는 지금은 답이 없는 문제에 도전하도록 부추기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물리적·심리적 안전망이 깔린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앞서 두 이야기에서와 같은 환경에서는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를 키워내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기업이 인재의 프로슈머가 되어야 한다. 길러주면 데려다 쓰겠다는 수동적인 자세를 벗어나 미래 기술인재를 육성하는 사회적 투자에 적극 나서야 한다. 우리 기업에 꼭 오지 않더라도 한국 산업계 어딘가에서는 역할을 할 것이고, 결국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재양성에 투자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공헌으로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로운 프로젝트는 없다. 또한 기업 현장이 또 다른 학습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재교육의 기회를 더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인재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고, 국가적인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무인기 사례처럼 도전적 시행착오의 싹을 자르는 추격시대의 제도와 관행은 없는지부터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혹여 한국 산업의 미래에 대해 밝은 전망이 어디 없을까 찾는다면 팁스(TIPS)라는 민간주도형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의 발표 경연장을 찾아가볼 것을 권한다. ‘가슴이 뛴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4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간의 노력을 압축해 발표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젊은 기술창업자들의 열기가 가득하다. 박사학위를 갓 받은 재료공학자가 최신 배터리 소재를 발표하고, 대기업을 뛰쳐나온 인공지능 전문가가 교육격차를 메워줄 새로운 인공지능기반 교육프로그램을 내놓기도 한다. 문답 시간에는 그간에 겪었던 도전과 실패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이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지향하는 표준적인 모델이 되도록 해야 한다. 방법과 수단·정책 제안은 차고 넘친다. 국가적 과제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에 둘 수 있느냐가 문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