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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태석 신부, 희생, 봉사, 가톨릭

FERRIMAN 2021. 12. 23. 11:37

[박정호의 시선] 이태석 신부의 성탄절

입력 2021-12-20 00:29:00
수정 2021-12-20 15:43:00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성탄 미사를 올리고 있는 이태석 신부. 사진 왼쪽에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가 보인다. [사진 한국살레시오회]

2004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 편지가 서울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가 띄운 편지다. ‘가난의 땅’ 톤즈에서 의료봉사를 하다 그해 여름 3년 만에 고국을 찾은 그는 방한 중 크고 작은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간호사·선생님·가정주부·해물탕집 아주머니·학생 등등, 1%의 나눔으로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 사람들에게다. 

 이 신부는 그들을 ‘특별한 계산법’으로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들이 나눠준 1% 때문에 ‘백·천·만’이라는 기적이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성서에 나오는 과부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속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혼자가 아니구나!’ ‘정말 잘 살아야 되겠구나!’, 오지에서 고생하며 혼자서 투덜대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1%의 나눔'이 만들어가는 세상 
 2004년 여름, 이 신부는 한국에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KBS ‘한민족 리포트’(2003년 12월)에서 방영된 ‘아프리카에서 찾은 행복’이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직후였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지원을 호소했다. "나누기엔 가진 것이 너무 적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하찮을 수 있는 1%가 누군가에게는 100%가 될 수 있습니다."   

 전기작가 이충렬의 신간 『신부 이태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작가에게 부탁해 이태석 신부가 보낸 편지도 따로 구해 읽었다. 악화일로 코로나19 팬데믹에, 첩첩산중 대선 정국에 성탄절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은 요즘이건만, 이 신부의 고투는 여전히 사랑과 희망이란 꺼져버린 불씨를 되살려준다.   

 이 신부와 성탄절의 인연은 깊다. 어린 시절 혼자 풍금을 깨친 그는 초등 5학년 때 동요 ‘성탄’도 작사·작곡했다. ‘주-여. 굶주리는 이들을 보소서/이 기쁜 성탄날에도 추워 떨고 있어요/아기 예수여, 그들을 위로하소서/그들도 어린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연이랄까. 육군 중위 제대를 앞둔 1990년 12월, 군의관 이태석은 레지던트 시험을 접고 부대 인근의 전의성당(충남 연기군, 현재 세종시) 십자가 앞에서 성소(聖召)에 응했다. 아기 예수를 맞을 준비를 하는 때였다. 이충렬 작가는 이렇게 썼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며칠, 의사가 아니라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눈물은 하느님께서 닦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한 후 전공의 시험을 포기했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펼쳤던 이태석 신부. [사진 KBS]

 유쾌한 성탄절도 있었다. 사제 이태석이 톤즈에서 처음 성탄을 맞이한 2001년 일이다. 그가 쓴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2009)에서 "예수 탄생의 의미를 어느 해보다 깊이 느낀 은혜로운 성탄절"이라고 기억했다. 성탄 이틀 전부터 톤즈 수도원은 새 옷을 입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외국에서 들어온 구호물자였지만 톤즈 사람들에겐 귀한 보물 같았다. 알록달록 옷차림의 성탄 전야 미사, "파리의 유명한 패션쇼를 방불케 한" 자리였다. 성탄 당일, 어린 생명도 태어났다. 이 신부는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란 이름을 지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탄절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면 가난한 곳 어딘가에서 계속 태어나고 있을 예수님을 몰라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 이태석의 속살 추적한 전기
 이 신부의 마지막 성탄도 뭉클하다. 2008년 말 휴가차 귀국했다가 대장암 판정을 받은 그는 선종 석 달 전인 2009년 늦가을 말기암 환자가 머무는 경기도 양평 수도원에 들어갔다.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에도 나오듯 지인이 찾아오면 진통제를 먹고 애창곡 ‘열애’를 불러 젖혔다.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신간 『신부 이태석』은 ‘성자’ 가 아닌 ‘사람’ 이태석을 훑는다.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한 인간의 헌신에 집중한다. 1999년 여름 로마 유학 시절 톤즈에 선교 체험을 갔다가 한센병 환자들의 악취를 참지 못하고 빈 들판으로 도망친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 좌절이 훗날 톤즈의 이태석을 만든 반석이 됐다. 그보다 앞서 톤즈 공동체란 텃밭을 처음 일군 인도 출신 제임스 신부의 영향도 결정적이었다. 신부 이태석은 혼자가 아닌 ‘여럿의 1%’가 모이고 모인 결과인 셈이다.



우리 사회 팀워크 회복 일깨워줘
 에피소드 하나. 전역 직후 사제 지망생 이태석이 찾아간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만난 노숭피(미국인 로버트 신부의 한국 이름, 로버트+숭늉+커피) 원장은 농구 선수 출신이건만 그곳 아이들과 놀 때 절대 골을 넣지 않았다. 이태석이 그 이유를 물었다. 노 신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농구의 생명은 패스입니다. 패스는 서로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슛을 안 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슛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팀워크를 통해 이긴 기쁨은 모두의 것이지요." 2021년 이 싸늘한 성탄 시즌, 우리 사회의 팀워크를 곰곰 되새겨본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