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에너지

[중앙일보] 탄소중립, 환경, 수소경제, 수소, 수소 생산방법

FERRIMAN 2022. 1. 9. 11:40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탄소중립 위한 수소경제, 긴 호흡 필요하다

입력 2022-01-03 00:35:00
 
왜 지금, 다시 수소인가
 

서울 상암동에서 사무용 가구업체를 운영하는 박 사장은 수소전기차를 탄다. 회사 근처에 수소충전소가 있어서 불편이 없다. 박 사장은 "5분 남짓이면 충전이 끝나니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며 "며칠 전 부산 출장길에도 고속도로 상·하행선 휴게소 여러 곳에 수소충전소가 있어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2021년 말 기준, 수소전기차 2만여 대가 국내 도로를 누비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다. 한국은 명실상부 수소전기차 선도국이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도심에 수소충전소 수가 많지 않아 긴 줄 서기가 일쑤다. 시판 중인 수소전기차는 한 차종뿐이라 충전소 풍경은 마치 현대 넥쏘 동호회 정모(정기모임) 같다. 날개 돋친 듯 팔리는 배터리 전기차와 비교하면 수소전기차의 행보는 답답하다. 괜찮다는 입소문을 탔지만 공급이 따라가지 못한다. 

■ 「 기후위기로 수소 중요성 더 커져 한국 관련기술 세계적 수준 도달 현재는 천연가스로 수소 만들어 태양·바람 부족한 한국 여건 취약 물 열분해로 수소생산 기술 갖춰 여야가 손잡고 관련법 개정해야 」   

국내 수소전기차 2만대, 세계 최다 

서울 여의도 국회 수소충전소에서 세워진 수소 차량 충전구에 충전 장치가 꽂혀 있다. 지난해 2월 ‘수소경제 육성 및 수소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연합뉴스]

수소전기차의 핵심인 연료전지 스택 양산이 문제다. 세계 최대 설비인 현대모비스 충주 공장이 연산 2만3000대 수준이다. 지난 10월 착공한 인천 청라와 울산 공장이 본격 가동되는 2024년이 돼야 연 10만대를 넘기게 된다.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 실적은 약 640만대로 추산된다. 수소전기차는 수소경제의 첨병이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기술발전 속도가 이번에도 수소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인가. 

‘이번에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수소경제 드라이브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5년 ‘수소경제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며 ‘2040년까지 수소차 1250만대’라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제1차 수소경제 이행 기본계획’이 2050년까지 수소전기차 526만대 보급을 목표로 제시한 것과 비교하면 2005년의 목표는 그야말로 허황한 꿈이었다. 당시 주요 선진국들에서 수소경제 붐이 일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경영대학원의 제러미 리프킨 교수가 2002년 출간한 베스트셀러에서 수소경제를 역설했고, 2003년에 미국 정부가 ‘수소 연료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것이 수소 붐에 기름을 부었다. 아니, 수소를 뿜었다고 해야 할까. 

리프킨의 수소경제론은 예전에 수소전기차에 진심이었던 제너럴모터스(GM)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깃발을 들자 수소연료전지 기술을 키우던 일본·한국·영국·독일 등이 앞다퉈 수소경제 비전을 발표해 호응했다. 하지만 이 ‘1차 수소 붐’은 2010년을 전후해 일제히 사그라들었다. 기술발전과 산업 형성이 받쳐주지 못하자 환상에서 벗어나 수렁에 빠진 것이다. 

2000년대 초 친환경 에너지보다 석유업계에 가까웠던 공화당 정부의 미국이 수소를 들고나온 이유는 뭘까. 머지않아 석유가 고갈의 내리막길에 돌입한다는 소위 ‘피크 오일(peak oil)’론이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수소가 석유의 유력한 대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석유 경제 붕괴를 우려한 석유 메이저들이 수소에 주목했다. 

석유·가스 같은 생산·저장 체계 필요 

수소(H₂) 생산 방법

수소는 물질 형태의 에너지 매체이므로 석유나 가스와 비슷한 생산·운반·저장 체계를 필요로 한다. 중앙 집중적인 에너지 헤게모니를 지킬 수 있다. 유럽과 한국에서는 수소의 다른 측면에 주목했다. 수소가 석유를 대체한다면 러시아나 중동으로부터 수입하는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줄일 수 있어 에너지 안보에 도움이 되고, 연료전지 분산 전원이 에너지 민주화를 앞당길 것이라고 보았다. 

꺼져가던 수소의 불꽃은 2010년대 말 다시 피어오른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것인가. 한국과 일본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동차 산업이 중요하고 수소경제의 중심에 있다. 그때는 수소전기차가 시제품뿐이었고, 지금은 일반 소비자가 구입할 수 있는 양산 수소전기차가 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 사이 수소에 대한 기대의 무게 중심은 석유 대체에서 탈(脫) 탄소로 바뀌었다. 기후변화 위기가 고조되고,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 이후 2050년 탄소중립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수소는 가스터빈이나 수소내연기관에서 바로 태울 수 있고, 연료전지에서 전기를 뽑아낼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배출되는 것은 수증기다. 직접적인 탄소 배출이 없다. 

하지만 현혹되기 쉬운 ‘무한한 친환경 에너지원, 수소’는 사실이 아니다. 수소는 무진장 존재하는 원소지만 자연계에서 화합물로 존재한다. 연료가 되는 이원자분자(H2) 형태의 수소는 에너지를 써서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 수소가 산소와 결합하면서 에너지를 내고 물이 되므로 순환이라는 측면에서는 무한한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은 천연가스를 개질(改質)해 수소를 만들고 있다.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로 물을 분해해 얻는 ‘그린 수소’는 아직 경제성 확보가 난망하다. 오늘의 수소는 화석연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수소경제론의 취약한 부분이다. 

일본과 유럽도 수소경제를 다시 추진하고, 호주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사막에 태양광 패널을 깔아 그린 수소를 생산, 수출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국만 ‘수소의 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탄소중립을 위해 재생에너지로의 대대적인 전환이 필수인데, 안타깝게도 재생에너지 자원의 지리적 편차는 석유 못지않다. 햇빛은 저위도 사막에 풍부하고, 바람에도 품질이 있다. 

석유처럼 재생에너지 수입할 처지 

한국은 재생에너지 자원 빈국(貧國)이다. 게다가 재생에너지는 근본적으로 에너지 밀도가 낮아 설치 면적이 넓어야 한다. 국토가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에서 풍력은 언덕과 바다 위로, 태양광은 산비탈과 간척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친환경 발전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 역설이 생기는 이유다. 앞으로 에너지 다소비 산업구조를 가진 재생에너지 자원 빈국은 재생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 

전기는 수천 ㎞ 멀리 보내기도, 저장하기도 어렵다. 수소가 파고드는 전전기(全電氣) 사회의 틈이 이 지점이다. 석탄을 사 오던 호주나, 석유를 사 오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소를 사 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린 수소 생산과 수출을 위한 역량과 인프라를 차질 없이 갖출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장거리 수소 운송 기술도 이제 구상에 들어간 정도다. 해외 수소에 의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 크고 에너지 주권 확보라는 수소경제의 이상(理想)과도 어긋난다. 

세계 각국이 수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수소가 궁극의 에너지 자원이기 때문이 아니다. 수소는 지난 200여년간 인류를 풍요로 이끈, 그러나 기후변화라는 재앙을 야기한, 화석연료기반 체제를 지속가능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교 이상의 역할을 할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된다. 화석연료를 닮아 기존 행위자들이 전환에 나서기 용이하고, 공급자 측면에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으며, 사용자에게 불편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수소의 미덕이다. 

에너지 전환은 손바닥 뒤집듯 일으킬 수 없다. 전환 과정에서 기존의 화석연료 기반 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적폐로 몰아 내팽개치면 안 된다. 주유소가 수소충전소로, 석유회사가 수소회사로, 화력발전소가 수소터빈과 연료전지 발전소로, 자동차회사가 전기차회사로 점차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이 지난한 사회기술적(sociotechnical) 변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수소의 의의가 다시 보일 것이다. 

한국은 1980년대 말부터 G7 프로젝트, 21세기 프런티어 사업 등 여러 국책 연구사업을 통해 산·학·연이 협력하여 수소에너지 기술을 개발해 왔다. 한국이 오랜 기간 뚝심 있게 독자적 역량을 축적해 세계 선도 수준에 도달한 기술은 흔치 않다. 물량과 다양성 측면에서 배터리 전기차가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고, 수소전기차 시장도 수소 인프라를 갖출 일부 선진국들로 국한되겠지만 전기화 모빌리티에서 수소전기차의 영역은 남아 있다. 기술발전 속도가 느린 것은 수소에너지의 오랜 숙명과도 같다. 수소는 긴 호흡과 먼 안목이 필요하다. 조급증은 다시 한번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초고온가스로 개발이 현실적 대안 

수소에 대한 기대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우려스럽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A안)를 보면 2050년 산업부문 에너지 수요의 4분의 1을 수소가 담당하는 것으로 제시돼 있다. 그 정도 수준의 수소경제를 구현하려면 청정수소를 싸고 안정적으로 대량 공급해야 한다. 

원자로의 일종으로, 섭씨 900도에서 물을 열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 초고온가스로(VHTR)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미 국내 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개발이 진척돼 우리 기술로 완성할 수 있다. 그간 수소 커뮤니티는 원자력과 거리를 뒀다. 청정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제 수소는 에너지 믹스(mix)의 주류에 편입되려고 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할 시간이다. 

수소가 이번 정부의 시그니처 정책으로 낙인찍혀 정치화돼선 안 된다. 이미 산업계가 ‘코리아 H2 비즈니스 서밋’을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차기 정부 리스크’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여야 합의로 수소법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하고, 대선 후보들이 나서 수소경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박상욱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