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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노조, 노동조합, 공정성,

FERRIMAN 2022. 3. 4. 16:02

도요타 노조의 공정성 잣대

중앙일보

입력 2022.03.03 00:28

대학교수들이 강의평가에서 학생들로부터 유독 낮은 평가점수를 받는 항목이 ‘성적평가는 공정하였는가’이다. 직장에서도 임금이나 승진 결정에 대해 직원들이 늘 불만을 보인다. 보상에 쓰일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에 자신이 받는 보상의 몫과 타인의 몫이 비교될 수밖에 없다. 보상을 결정하는 경영층이 아무리 객관적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불만이 나오는 이유는 공정에 대한 선호 유형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공정성 값은 이론적으로 자신의 투입(input) 대비 보상(output)의 비율로 산출된다. 자신의 투입은 타인보다 많은데 보상은 상대적으로 작다고 느끼면 불만과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선호하는 공정성 유형에는 개인차가 존재한다. 남들보다 노력과 수고를 더 많이 하면서도 정작 보상은 크게 바라지 않는 ‘자비형’이 있는가 하면 남들보다 수고나 노력은 적게 하면서 더 큰 보상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특권형’도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은 아들러(A. Adler) 심리학에 개념적 뿌리를 둔다.

아들러는 특히 자비형 인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받기’보다 ‘주기’를 선호하고 협력과 기여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에 유용한’ 사람들이다. 자비형은 청교도적 노동윤리 같은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서 출발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원천은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보다 타인과 협력하는 공감 능력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형제를 위해 무료 치킨을 내준 자영업자 소식에 네티즌들이 주문 폭주로 응답했다. 최근에는 납품업체 직원의 실수로 각(갑)티슈 주문을 2000만원어치나 더한 일이 발생하자 전국의 자영업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주문을 해줘서 모두 판매된 일도 있다. 아들러가 20세기 초반 설파한 ‘사회에 유용한 인간형’이 오늘날에도 시대정신을 관통한다.

이에 비해 특권형은 받기만 하려는 사람이고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므로 사회에 유용한 자비형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남에게 신세 지거나 은혜 갚을 일이 없으니 자신의 몫은 늘 당당하다. 사회학자들은 서구에서 이러한 특권형 성향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소위 ‘불안세대’가 출현한 것과 연관시켰다. 노동윤리 가치관은 퇴색하고 세상이 무너지기 전에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얻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국가마다 배경 요인이 다르겠지만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현상과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불공정한 처우로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노조와 같은 집단적 울타리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특권형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해 대리점주 사망과 최근까지 이어진 택배노조의 파업은 그 과정에 노조원과 비노조원 택배기사, 대리점주, 택배회사라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관여돼 있다. 이들 중 누가 불공정의 희생자인지 가리기 쉽지 않다. 다만 평균 연 소득(세전) 약 8500만원에 달하는 노조가입 기사들의 폭력적 파업은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

코로나19 재난에도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사상 최대의 이자이익을 냈고 직원 성과급으로 기본급의 300%가량을 지급했다. 공공성이 강한 은행들이 무주택 서민과 자영업자들의 대출로 얻은 이익을 성과급 잔치로 소진한 것은 ‘사회적 유용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지난해 순이익 24조원을 올려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운 일본 도요타자동차 노조가 올해 제시한 임금협상 방안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까지는 호봉에 따른 일률적 임금인상 방식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전 조합원을 직종·직급 반영한 12개 집단으로 나누고 각 집단의 인상액에 차등을 두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연구·관리직종의 대리·과장직급은 월 5만원 정도 인상하지만 동일 직종의 부장급은 월 3만5000원 정도 인상한다. 도요타 노조가 호봉제 성격의 인상 방안을 폐지하려는 이유가 더욱 놀랍다. 완성차 업계의 환경이 열악해지고 인재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젊고 유능한 인재에게 더 많이 보상해야 회사가 경쟁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회사의 미래를 열어주는 진정한 공정성이 무엇인지를 노조가 제시해준 사례이다.

지극히 공정한 사회는 지위나 계층에 상관없이 온전히 내 힘으로 일구었다는 특권의식을 버릴 때 실현된다. 지난주 별세한 이어령 전 장관의 “생의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한 것이 다 선물이었다”라는 마지막 말씀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