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문화의 창] 시각장애인의 옛 그림 감상
지난달 말일, 나는 경북도청의 동락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옛 그림 감상법’이라는, 세상에 있기 힘들고, 하기 힘든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회는 포스코와 경북도청 공동 주최로 포스아트(PosART)로 재현된 조선시대 명화 56점이 출품된 ‘철 만난 예술, 옛 그림과의 대화’(8월22일∼9월 22일)의 부대 행사로 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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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 위한 전시회서 강의, 포스아트 요철인쇄 만지며 감상, 예리한 형상적 상상력에 감탄사, ‘터치 미 뮤지움’ 설립 성사되길,」
시각장애인들이 경북 도청에서 열린 포스아트에 출품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만져보며 작품 감상을 하고 있다. [사진 포스코]포스아트는 부식에 강한 철판에 수차례 반복적으로 물감층을 쌓아 올리는 적층 인쇄 기법으로, 마티엘 효과까지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이 촉감으로 그림의 형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에 포스코는 지난 8월 31일 안동, 예천, 영주, 봉화 등 경북 북부지역의 시각장애인 30여 명을 특별전에 초대하여 작품 감상회를 열면서 나에게 특강을 요청한 것이었다. 시각장애인이라 하여도 후천적인 경우, 예를 들어 11살 때 녹내장을 앓다가 시각을 잃은 분, 교통사고로 실명한 분 등은 말로 설명해주면 능히 그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부터 설명하였다.
“서양에서는 교회당과 대저택의 장식벽화가 발달하였고 감상화로 풍경화, 정물화 등이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지는 것은 17세기 와서의 일입니다. 이에 반하여 동양화는 10세기 이전부터 수묵화에 의한 산수화, 사군자, 화조화, 인물화, 풍속화 등 감상화가 발전하였습니다.”
시각장애인 곁에는 자원봉사 도우미가 있어 대신 필기도 해주고 있었다.
“옛 그림의 핵심적 주제는 산수화입니다. 산수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5세기 종병이라는 분이 늙어서 산에 갈 수 없게 되자 방에다 산수화를 그려놓고 누워서 감상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를 와유(臥遊)라고 합니다. 처음 산수화가 등장할 때는 대자연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었는데 점차 인간이 서정을 발하는 산수인물화로 바뀝니다. 선비가 바위에 턱을 기대고 냇물을 바라보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자 앞쪽에 앉아 있던 분이 도우미에게 낮은 목소리로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송나라 휘종 황제가 화가를 뽑는 시험문제로 ‘봄나들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말발굽마다 일어나는 꽃향기를 그리시오’를 출제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수강자들은 ‘아!’하는 조용한 감탄과 함께 엷은 미소를 보였다.
“그때 장원으로 뽑힌 작품은 말 타고 흥겹게 돌아오는 행렬 뒤로 나비가 따라오는 것을 그린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한 번 ‘아!’하는 가벼운 탄성과 함께 밝은 미소를 보였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설명에서는 그림의 형태는 물론이고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게 되는 긴 과정도 이야기하였고, 화조화로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부인이 보내준 치마폭에 딸을 위해 매화 가지에 앉은 새 두 마리를 그린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내 강연이 끝난 뒤 수강자들과 작품 감상을 하는데, 역시 스토리텔링이 있는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암의 ‘강아지’, 변상벽의 ‘고양이’ 등 형상이 있는 그림에 많이 몰렸다. 그중 최고 인기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였다. 특히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미인의 기준은 시대마다 계속 바뀌게 마련인데, 현대의 미스 코리아로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서구형 얼굴이 많지만 혜원의 미인도는 전형적인 조선적인 미인으로 김연아 선수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고 하였다.
참으로 보람 있는 전시회 안내였다. 나는 10여 년 전에 대구지역 시각장애인들과 현풍 도동서원 답사도 한차례 한 적이 있어서 시각장애인들이 형상 인식을 어떻게 하는지 대략 알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형상적 상상력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예민한 경우가 많다. 오래전 바둑TV에서 시각장애인 아마 7단이 바둑 두는 것을 중계하였는데, 200수 넘는 바둑판의 공배까지 다 메우고 계가도 직접 하는 걸 보았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전시 관람을 마친 뒤 포항에 사신다는 경북시각장애인협회 김일근 회장은 뜻하지 않은 호사를 누렸다며 ‘터치 미 뮤지움(Touch me museum)’이 꼭 세워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말하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이 아주 찐하게 다가왔다.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일반인 못지않게 문학과 음악에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미술 공부도 많이 하여 소양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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