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시론 나노기술이란 나노미터(10-9m) 크기의 원자 수준에서 물질을 조작 ∙ 분석하고 제어함으로써 새로운 물리적 ∙ 화학적 ∙ 생물학적 특성을 지닌 소재나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가리킨다. 우리의 필요와 목적에 맞게 물질을 조작 ∙ 변형시키거나 신물질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원천 기반기술로서 가까운 미래에 재료, 전자, 기계, 생명, 의료 및 의약, 에너지, 환경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기술혁신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미래 산업 경제 패러다임은 물론 인간의 삶의 모습까지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환경 오염물질 제거, 암 치료, 생명주기의 연장, 반도체 성능 향상, 식량난 해소 등등, 그것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이득이 얼마인지 평가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이 잠재력은 동전의 양면처럼 위기가 될 수 있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나노소재가 인체의 건강과 환경에 가할 수 있는 위해성이다. 차세대 반도체 나노물질의 하나인 CdSe가 인체 내에서 카드늄(Cd) 중독을 유발할 가능성, 탄소나노튜브가 생체의 유전자 역할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치어의 뇌를 손상시킨 사례, 은 나노 입자로 인한 인체 DNA 손상 가능성 등등, 이처럼 2004년 이래로 나노물질의 심각한 독성에 관한 수많은 보고들이 발표되어 왔다. 아직도 그 안정성이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나노물질들이 현재 개발 중에 있거나 이미 상품으로 개발 ∙ 유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노기술의 환경성 연구비 계속 늘어
그래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 EU, 일본 등은 각 국가별로 ‘나노기술이 환경 ∙ 보건 ∙ 안전에 미치는 영향 및 위험성 평가 연구’(이하 EHS 연구: Environmental, Health and Safety)를 2004년 이래로 매우 활발하게 진행시켜 왔다. 실제로 이 부문에 대한 연구비 지원 규모를 보면 미국의 경우 계속 늘어나서 2007년에는 나노기술 연구개발비 총액 대비 3.5%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통해 2006년에는 화학물질위원회 산하에 ‘제조된 나노물질 작업반’(WPMN)을 설치하고, 2007년에는 과학기술정책위원회 산하에 ‘나노기술작업반’(WPN)을 설치하여, 나노물질의 연구개발 및 상품제조 과정에서의 위해성 및 안전성 문제 해결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사실상 나노물질의 독성 및 안전한 관리를 위한 기술공학적인 연구로서, 나노기술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필요한 1단계 조치에 불과하다. 실제로 나노물질이 실험실에서 연구 ∙ 개발된 이후에도 공장에서 제품으로 생산되고, 다시 이를 활용한 새로운 조립품이 제조되어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최종적으로 소비자는 이를 구매하여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는 기술공학적 문제 외에도, 제품의 생산 과정 및 사회적인 소비과정과 관련하여 윤리적 ∙ 법적 ∙ 사회적 문제들이 노정돼 있다.
가령 새로 개발된 나노물질이 독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엄청난 산업적 ∙ 경제적 가치 때문에 연구자 또는 생산업자 또는 판매자에 의해 위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없이 만들어져 유통됐다면, 이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나노기술의 윤리적 ∙ 법적 ∙ 사회적 이슈에 관한 연구’(이하 ELSI 연구: Ethical, Legal and Societal Issues) 또한 전술한 기술공학적인 연구 못지않게 안전한 나노기술의 개발을 위해 매우 필요하고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사회 ∙ 문화적 영향에 대한 평가는 과학기술의 연구 ∙ 개발 활동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여 연구 ∙ 개발 단계에서부터 작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는 과학기술이 일단 연구 개발된 이후에 그것이 적용 및 응용 단계에서 특별히 심각한 위험이나 문제를 야기할 경우에 한해 기술적으로 혹은 사회제도적으로 이를 통제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과거 원자폭탄 제조기술, 컴퓨터 기반 정보통신기술, 각종 환경침해 기술 등에서 우리는 이런 경향성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유비쿼터스기술 등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나노기술 개발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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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노기술이 생명과학에 응용되면서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생겼다. 출처 : http://hplusart.org/COMINGTECH.htm |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것들의 위해성에 관한 진단이 과학기술 내부에서 충분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 위해한 결과가 나타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경로도 복잡하여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을 찾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위해성을 검증하는 과학기술의 연구 수준 자체가 상품 경제논리에 밀려 상대적으로 뒤쳐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기술적 통제의 불확실성은 결국 기술의 ‘안전하고 지속가능한’(safe and sustainable) 발전이라는 문제를 주요 이슈로 등장시켰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 ∙ 법적 ∙ 사회적 제어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됐다. 이는 결국 과학기술 활동의 사회적 책무성, 기술의 사회적 수용과정의 정당성,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시민사회의 동의 등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새삼 중요한 문제임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나노기술에 관한 ELSI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미국과 EU의 국가들에서다. 미국의 경우 2000년에 국가과학재단(NSF) 주최로 ‘나노과학과 기술에 관한 사회적 영향’에 관한 대규모 워크숍이 있은 이후로 2005년까지는 주로 EHS 연구에 주력해 오다가 2006년부터 ELSI 연구에 본격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2007년 연구비 지원 규모에서 ELSI 연구 비중이 EHS 연구와 거의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ELSI 연구가 최근에 이르러 한층 강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유로 국가들의 경우 주로 UNESCO를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2006년에 “나노기술의 윤리와 정책”이라는 제목의 연구 보고서 및 윤리 전문가 그룹의 보고서 등이 발표됐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제기됐던 몇몇 윤리적인 이슈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험수준 · 프라이버시 · 나노격차 · 군사목적 등 쟁점
첫째 나노물질의 위해성 문제와 관련하여, 위험의 수준을 어느 선에서 어떻게 결정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기술공학적 평가 이상으로 가치론적 평가를 포함하게 된다. 이익과 위험을 비교 평가하여 각기 어느 선까지 인정하는가의 문제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가치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다. 결국 사회의 여러 계층의 참여와 다양한 가치를 반영하는 기술영향평가 방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낳는다.
둘째 나노크기의 탐구 장치의 개발은 인간의 DNA 자체를 조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전자 수준에서의 생체 정보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근원적인 수준에서 유전 정보에 관한 프라이버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셋째 나노기술의 상품화가 가속화 될수록 부국과 빈국 간에, 사회적인 계층 간에 이의 이용과 관련하여 기존의 사회적 차별이 점점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소위 ‘나노 격차’(Nano Divide)라 불리는 이 문제에 직면하여 차별이 아닌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넷째 나노기술의 군사적인 사용, 테러리즘에의 활용 등과 같은 오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의식의 변화와 함께 제도적인 강제가 필요하다. 특히 제도적인 강제를 정당화해 줄 윤리적인 논거의 제시가 매우 필요하다. 다섯째 나노기술에 관한 한 전문가 그룹과 일반 대중들 간에 갈등해소를 위한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이 소통을 통해 나노기술은 개발의 정당성과 관련하여 시민사회로부터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노기술의 연구 · 개발 · 생산 · 유통 과정에 종사하는 연구자, 생산자 등을 상대로 이들에게 필요한 윤리적인 규범을 만들고 이를 교육하는 문제 또한 중요하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기술’의 개발, 이것은 어쩌면 21세기에 인류가 재앙이 아닌 번영을 구가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심사숙고해야 할 어젠다(Agenda)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동역학의 인식론적 구조에 기초한 양자이론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과학으로 생각한다』, 『근대의 끝에서 다시 읽는 문화』, 『인문학으로 과학읽기』 등이 있다. 양자이론 해석과 기술철학에 관심이 많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