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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 고문 | 석학 인문강좌 이어령 중앙일보 상임고문은 11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경계파괴시대의 즐거운 인문학’이란 제하의 특별강연을 통해 “최근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경계파괴가 됐으니 서로 하나가 되자”란 주장은 웃기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이 고문은 “당초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경계가 없었는데, 두 학문 분야의 경계를 논하고, 경계를 파괴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며, 학문을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지금의 행태에 대해 큰 불만을 표명했다.
이 고문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울타리 속에서 서로 협력이 이루어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뉴턴이 인문학적인 영감을 통해 만유인력의 가설을 입증했으며, 괴테는 뛰어난 과학적 지식을 갖고 파우스트를 완성했음을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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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강연 | 다음은 이어령 고문의 특별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자연과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인문학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죽음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에 접한 생전의 아인슈타인은 당황했지만 “(죽음은) 아름다운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 것이다”란 재치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실에 “이 세상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설명된 것이 다 귀중한 것은 아니다”란 표어를 써 붙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다. 지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이 자연과학이라면, 지혜를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주장은 개미의 조직을 인간생활에 적용했을 때 생물학으로 인간사회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경계파괴론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하나가 되자는 주장들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근대 이전 학문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경계가 없었다.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경계를 파괴하자는 것인가.
뉴턴의 예를 들어보자. 뉴턴은 평소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사랑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물에 친화력이 있다는 (인문학적인) 가설을 갖고 있었다. 뉴턴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만유인력의 가설을 증명한 것이다.
작가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괴테는 위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의 기호학과 함께 물고기 수만 종을 손쉽게 분류할 수 있는 형태학을 창시할 만큼 뛰어난 과학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괴테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 2부에서 당시 연금술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수천 년 걸려 천천히 생성된 생명을 단 시간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을 이미 200여 년 전에 일축한 셈이다. 괴테의 대작들 속에 미래를 예측할 정도의 매우 뛰어난 과학적인 지식이 포함돼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뉴턴과 괴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위대한 과학자, 작가들은 자연과학과 인문학 간의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 간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작업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자연과학의 지식을 창출하고, 또 창출된 자연과학 지식이 또 다른 상상력을 창출하는 상관관계, 공존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공동으로 발전하는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그 어디에도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엄격히 구분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디에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풍수설이 체코 등 유럽 각국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사례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자연과학이 있음으로 해서 문학, 예술 등 인문학이 더 재미있어지고, 또한 인문학이 있음으로 해서 자연과학이 더 풍성해진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하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