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섬유 ‘나일론’ 국내 생산에 성공 일본 도레이사 한국나일론에 기술이전 결단... 2008년 10월 15일(수)
건국 60년 과학기술 60년 1935년 미국 듀퐁(Dupint)사에 근무하던 캐로더스는 탄소, 수소, 질소 등을 원료로 폴리아미드계의 복잡한 합성 섬유인 ‘나일론’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북한 정부로서는 비날론의 성과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중국과 소련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자립노선을 채택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심각한 의류난을 해결할 수 있는 첨단 섬유를 개발했다는 것은 자립노선의 성공을 상징하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이후 이승기 박사는 ‘공화국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북한 최고 과학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남한의 과학기술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북한의 자부심은 얼마 가지 못한다. 남한에서도 합성섬유인 나일론 개발이 독자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코오롱의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은 1957년 4월 12일 대구에 코오롱의 전신인 한국나일론주식회사를 설립한다. 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 기반을 닦은 바 있는 이 회장은 그의 호방한 사업수완을 발휘, 일본으로부터 나일론 제조기술을 도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 작품이 한국나일론이었다. 그리고 1963년 한국나일론은 일본 도레이사로부터 나일론 제조기술을 이전받는다. 당시 도레이사 마에다 회장은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회장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한국에 나일론 기술을 이전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에다 회장은 1999년에는 새한과 공동으로 도레이새한을 설립하는 등 40여 년간 한국과 협력을 이어가는데, 이 같은 공로를 인정해 한국 정부는 2005년 그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한다. 한국을 위해 많은 사랑을 베푼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63년 마침내 국산 나일론 제품이 선보이자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오래가는” 화학섬유 나일론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해외로부터 주문도 이어졌다.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제품이 부족해지자 코오롱과 경쟁하고 있던 경쟁사들이 동양나이론, 한일나이론 등의 업체를 설립하고 나일론 생산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반면 북한은 세계 섬유업계 흐름을 무시한 채 비날론 생산을 끝까지 고수한다. 북한이 품질 면에서 뒤지는 비날론에 집착했던 것은 비날론의 주 원료가 되는 석회석과 무연탄이 북한에 매우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낮은 원가로 많은 섬유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비날론 생산을 고수하는데, 이로 인해 이승기 박사는 북한 화학계에서 쌍벽을 이루던 여경구 박사와 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운형의 조카인 여경구 박사는 “비날론 공업으로 경공업의 미래를 열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나일론 공장 건설을 주장하다가 김일성으로부터 사상검토 지시를 받고 1977년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비날론을 사용하는 세계 유일한 국가가 되었고, 이후 섬유산업이 낙후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반면 한국은 나일론 기술과 면직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섬유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를 마련한다. |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8.10.15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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