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중앙일보] 걱정 총량 불변의 법칙

FERRIMAN 2009. 6. 24. 09:54

기사 입력시간 : 2009-06-24 오전 12:41:04
[김종수의 시시각각] 걱정 총량 불변의 법칙
얼마 전 직장의 대선배 한 분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걱정이 많은데 돌이켜 보면 어느 시점에 할 수 있는 걱정의 양은 대체로 일정한 것 같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큰 걱정을 하느라 회사나 가정에 대한 사소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막상 외환위기라는 큰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회사 내의 잡다한 불만과 가정사의 자잘한 문제가 불거져 나와 외환위기 못지않게 골치를 썩이더라는 것이다. 이분은 자신이 발견한 이 경험칙에 ‘걱정총량 불변의 법칙’이란 거창한 이름까지 붙였다. 어차피 걱정의 양이 일정하다면 걱정에 치여 살지 말라는 얘기다. 걱정 없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싹 거두고 마음 편히 지내라는 충고다. 인간은 아무리 용을 써 봐도 한평생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런 사실을 인간의 보편적인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인생의 경험에서 나온 이런 충고는 앞서 언급한 대선배가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호주의 언론인인 피터 피츠사이몬스가 일상생활에 적용될 만한 원리와 법칙을 모아 펴낸 『인생의 작은 법칙들(Little Theories of Life)』이란 책에는 놀랍게도 ‘걱정 총량의 법칙’이 소개돼 있다. 이 법칙의 요체는 한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걱정의 양은 정해져 있어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의 최대 걱정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어찌어찌 해서 무인도에서 살아 나왔다면 생존에 대한 걱정은 당연히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걱정거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인도에서는 생존에 대한 걱정이 100이었다면,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온 다음에 직장과 가족에 대한 걱정을 다 합치면 역시 100이라는 것이다. 결국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법칙의 적용 범위를 사회나 국가로 확대해 보면 어떨까. 어떤 시점에 사회나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걱정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전쟁과 같은 중대한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온 국민이 이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한다. 국가의 존립 여부가 국민적 걱정의 전부다. 이 와중에 사소한 계층 갈등이나 정파적 다툼은 걱정거리도 안 된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고 나면 큰 걱정에 묻혔던 갈등과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걱정의 수위가 다시 높아진다. 사회와 국가도 항상 무언가를 고민하고 걱정하느라 한시도 편한 날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지나온 우리의 근현대사는 늘 이런저런 걱정의 연속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걱정의 총량이 불변이더라도 무엇을 걱정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걱정의 총량이 일정하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결국 걱정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국민적 관심과 문제 해결 역량을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소모적인 갈등에 온 국민이 매달려 골머리를 썩일 수도 있고, 생산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데 국민적 에너지를 모을 수도 있다. 지난해 쇠고기 촛불집회처럼 무익한 갈등에 온 국민이 진을 뺄 수도 있고,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처?위기 극복의 묘안을 짜내는 데 한마음이 될 수도 있다. 둘 다 걱정의 총량은 같을지라도 걱정의 질은 천양지차다.

걱정 총량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걱정거리의 우선순위, 즉 국민적 관심과 역량을 집중시킬 국가적 의제(어젠다)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느냐의 문제다. 지난해 쇠고기 촛불시위 이후 국민적 걱정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경제위기 극복이 차지했었다. 그런데 경제위기가 웬만큼 잦아들면서 걱정거리의 우선순위에 혼선이 생겼다. 북핵 문제와 여야의 갈등, 노동계의 반발이 뒤엉켜 무엇부터 고민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 우선순위를 가려야 할 국회가 일손을 놓고 국민적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게 걱정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