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사랑처럼, 재능도 고백해 주세요
정재승
KAIST 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과
KAIST 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과
혼자만 하기 아쉬워, 2010년 9월 ‘저와 함께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강연기부를 해주실 과학자 없으신가요’라고 트위터에 글을 남겼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불과 8시간 만에 연구원·교수·의사·교사 등 100여 명이 기꺼이 강연기부를 하겠다며 신청을 해주신 것이다. 허드렛일이라도 돕겠다는 분, 책을 후원하고 싶다는 분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 덕분에 첫해 전국 29개 도서관에서 67명의 과학자들이 동시에 과학강연을 해주었고, 그 후로도 매년 40여 개 도서관에서 100여 명의 과학자들 덕분에 과학강연회가 열렸다. ‘1년 중 364일은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정당히 청구하지만,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하루만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내 재능을 기꺼이 나누고 기부하자’는 취지를 많은 분들이 공감해준 덕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TED강연에 비하면, ‘10월의 하늘’은 한없이 초라하다. 세계적인 석학이 강연하는 것도 아니고, 근사한 강연장도 없다. 비싼 참가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재능기부자들이 ‘TEDX 운영자’처럼 이력서에 스펙을 더해 주지도 않는다.
재능기부로 진행되는 ‘10월의 하늘’은 누구든 참여해 강연할 수 있다. 운영도 ‘기억으로 가입되고 망각으로 탈퇴되는’ 느슨한 운영기부자들만 있을 뿐이다. 책 후원 외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으며, 모든 활동이 재능기부로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의 하늘’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강연회의 감동을 잊지 못한 재능기부자들 덕분이다. 먼 거리를 버스 타고 온 학생들의 눈망울을, 40분 강연을 위해 3일을 준비하고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먼 도시까지 와서 강연해준 과학자의 열정을, 한 번도 과학강연을 준비해본 적 없는 도서관 사서의 친절한 배려를 잊지 못해 올해를 기다려온 분들 덕택이다.
네 살이 된 ‘10월의 하늘’에 올해 가장 중요한 화두는 지속가능성이다. 과연 이 행사를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트위터로 잠시 모였다가 강연회가 끝나면 바로 사라지는, 그래서 노하우가 축적되지 못하는 이 행사가 과연 10년 이상 버틸 수 있을까? 일시적인 기부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강연회가 되려면 어떻게 행사를 꾸려 나가야 할까? 이 화두가 올가을이 오기 전까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강연기부 과학자를 모집하기도 힘들었고, 두 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진행기부자가 부족한 도서관도 있다. 앞으로 홍보까지 하려면 더욱 버거울 것 같다. 재능기부는 2010년의 ‘올해의 키워드’였을 뿐, 이젠 철 지난 유행이 돼버린 걸까?
어쩌면 이 행사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른 행사들처럼 법인화된 조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상설 직원을 두고 1년 내내 운영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트위터를 통해서만 재능기부자를 모집하고 홍보하는 ‘10월의 하늘’의 개성도 이젠 포기해야 할까?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SNS뿐 아니라 언론을 활용하고 광고를 하는 것도 방법이리라.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수많은 조언을 뒤로하고, 올해도 첫해처럼 돈과 조직 없이 소박하게 시작했다.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폭발적인 열정을 만들어 낸다는 작은 믿음 하나로.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을 모집해 주고, 열정적인 재능기부자들이 모여 강연자와 도서관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전국 30여 개 도서관에서 과학강연회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겠다는 마음은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거대한 사랑고백’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준비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뜨겁게 만나고, 그날의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소중한 기억. 재능기부는 나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 대한 거대하면서도 따뜻한 사랑고백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듯, 재능도 세상을 향해 고백해 주셨으면 진심으로 행복하겠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 및 뇌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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