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김철우 박사

FERRIMAN 2013. 12. 9. 13:15

조국을 위해 발벗고 나섰지만...결국 조국에 의해 고문당하고 사형당한 슬픈 역사를 가진 해외동포----재일 동포들..(첫번째 김철우 박사)| [일반] 자료
달라이 라마 | 조회 151 |추천 2 | 2012.09.23. 02:28

많은 분들이 박정희 하면 5.16 군사반란. 또는 인혁당..그리고 크게는 유신... 옆에서 시바스 3갈 먹으며 띵까 띵까하다가

총맞았다...그것만 기억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1차적인 단편에서 본 추악함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어이 없는 희생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포철 (오늘날 포스코)설립에 과정에서 우리는 한 재일 동포 공학자에게도 빚을 졌습니다.

김철우 박사입니다.

 

도쿄 공업대학과 도쿄대 대학원을 나온 그는 재일 동포로서 첫 공무원이 된 인물입니다.

 

동포들의 자랑이었고 희망이였습니다.

 

그는 1968년부터 한국의 제철소 설립과 관련하여  온갖 조력을 했습니다.

 

1970년부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중공업 연구실장을 맡아 제철소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포철 1호기 용광로를 사실 설계한것이 그입니다.

 

1971년에는 포스코 (당시는 포철)의 간곡한 요청으로 도쿄대를 휴직하고 기술담당 이사로 공장 설립을 이끌었습니다.

 

포스코 사료 박물관에는 당시 그의 역할을 보여주는 박태준 사장과 주고 받은 편지가 지금도 여러 통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73년 공장 준공을 한달여 남기고 갑자기 보안사(보안사령부 -오늘날 기무사의 전신 .기무사는 국군 기무사령부

준말입니다.)에 끌려갔습니다.

 

그해 6월5일치 신문은 그를 "기간산업에 침투한 거물간첩 "이라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그를 만나러 서울에 온 동생(홋카이도 대학 조교수)을 포함해 4개망 간첩 11명을 보안사가 체포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납니다.

 

그는 결국 간첩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6년 반을 복역합니다.,

 

일본의 지식인들과 재일동포들의 무죄탄원이 줄을 이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이 억울한 옥살이 뒤에 석방 뒤 도쿄로 돌아왔다가 1980년 영구귀국하였습니다.

 

포스코에서 부사장 대우로 일했고 지금도 많은 한국기업인들을 돕는다 합니다.(이 자료가 2011년 자료입니다.)

 

 

그는 1970년 북한을 분명히 다녀왔습니다., 그의 큰형을 비롯한 귀국선을 탄 형제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꾀임에

넘어가  간것이지요,.

 

귀국선 아시지요?1959년부터 일본 적십자사가 재일 교포들 중에서 북한으로 귀국을 원하는 이들을 북송선에 보내기로

 

북한과 합의합니다. 당시는 일본이 남한보다 북한하고 친했습니다. (친하다는 표현이 그렇지만..당시 이승만 정부는

반공외에 반일 정책을 하고 있었는데 밖으로는 반일을 했지만...안으로는 친일파들을 기용했고..정작 일본땅에서

차별을 받고 있던 동포들을 나몰라라 외면했습니다.)

 

이에 일본에서 차별받던 동포들은 북송선을 탑니다. 당시는 북한이 우리보다 잘살았으니까요..

거기다 북한도 무슨 이유인지..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1960년대 초반 북송선에 탔던 재일 교포중에는 훗날

김정일의 부인이 된 고영희도 가족들과 타있었지요.

 

다시 이야기가 돌아와서 북한은 그의 형제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용하려고만 했지요. 물론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단지 형을 만나러 북한에 갔었다는 그 이유로..그는 간첩이 됩니다.

 

그가 북한에 갔던 사실은 몇가지 살만 덧붙이면 산업계에 침투한 간첩으로 만들어내기 딱 좋은 재료인것이지요.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서 손목의 동맥을 잘라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살아난뒤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재일 동포들중에서 약 160여명이 이런 간첩누명을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누명을 씌여서 간첩으로 몰려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심한 경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도 있습니다.

 

몇해 전부터 그들이 하나 둘 재심을 신청했고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0명이 재심이 개시되어 그 가운데 5명은 이미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이제 김철우 박사에게도 법원이 하루 빨리 재심 개시결정을 내리고 밝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료 인용 :2011년 11월 3일 한겨레 특파원 칼럼 - 간첩 김철우를 아십니까-에서 <정남구 도쿄 특파원>

 

김철우 박사가 어떤분인지 궁금해 하실것 같아서..제가 POSCO 자료에서 찾았습니다.

 

마지막에 박정희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는것에 찬성은 안하지만 어쨌든 그대로 올립니다.

2006년도 자료입니다.

 

 

[포스네트] 쇳물에 흐르는 푸른 청춘들(40) - 김철우 전 포스코 부사장대우
2006-01-12
  

 

 

쇳물에 흐르는 푸른 청춘들(40) - 김철우 전 포스코 부사장대우
“박대통령 제철소 건설 엄명” 도움 청해


[약력]

- 1926년 일본에서 출생해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금속학을 전공.

- 1956년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 연구원, 197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중공업연구실장을 지내다 1971년 포철 기술담당 이사 겸임.

- 1982년부터 1989년까지 부사장대우 역임.

- 1989년 RIST 선임연구원과 소장을 지냄.

- 현재 일본철강협회 명예회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한국테크노마트 이사장.

포항제철소로 가는 인연

산업과학기술연구(현 RIST)창립 기념식이 열린 1987년 3월 27일 연구소 실험동을 찾은 고준식 사장과 최형섭 상임고문(전 과기부 초대 장관), 필자(맨 오른쪽)

“내가 맡은 이상 부정 없다”

박 사장 단호함에 감동받아

사람에게는 탄생 선택권이 없다. 나는 1926년 3월 일본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경남 의령, 어머니는 합천이 고향이다. 일찍이 부모께서 부관연락선에 몸을 실은 까닭은 순전히 ‘생계’문제였다. 일본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으나 가난을 벗진 못했다.

생활이 빈궁해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나는 금속학도의 길을 택했다. 도쿄공업대학, 도쿄대학 대학원을 거쳐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첫 봉급은 1만 2000엔. 적었지만 드디어 식사는 제대로 할 만한 수준이었다. 장차 18년을 근무하게 되는데….

대한중석 박태준 사장과의 첫 만남은 1965년에서 1966년에 걸친 언저리였다. 대한중석의 도쿄 주재원 주영석씨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고 약속된 호텔 식당으로 나갔다. 나의 봉급으로는 출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미 박 사장은 제철소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의 언질을 받았을 것이다. 나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후식으로는 못 본 과일이 나왔다.

내가 이름을 물었더니, 박 사장이 ‘망고’라고 알려 줬다. 이렇게 우리의 첫 만남에는 망고가 남았다. 가난하게 살아온 나는 그것을 ‘대단한 사람’이나 먹는 거라고 알았던 것이다. 그 뒤로는 대단해 보인 박 사장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때 박 사장이 왜 나를 찾았을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당시의 롯데 신격호 사장을 얼른 떠올리게 된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신 사장이 비서를 시켜 만나자는 연락을 넣고 차를 보냈다. 울산이 고향인 그는 나에게 동향의 이후락씨로부터 “한국에서 제철소 해 봐라. 박 대통령이 어떡하든 하라는 엄명이다”라는 부탁을 들었다며 도움을 청해 왔다.

나는 조국을 위해 좋은 일이니 도와 드리겠다고 답했다. 내 주변의 제철 전문가는 20명쯤 되었다. 특히 후지제철소 기술본부장으로 있는 은사가 중요했다.

은사의 소개로 신 사장과 함께 후지제철 나가노 사장을 만나러 갔다. 이때 나가노 사장에게 터키에서 온 제철소 관계자 얘기를 들었다. 50만톤짜리 제철소를 하기로 했는데 중간에서 뜯어먹혀 20만톤도 어려우니 도와 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제철소 건설과 못난 권력의 위험한 관계를 알아챘다.

초콜릿과 껌과 과자로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 사장은 나가노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얇은 것은 잘 만들지만 두꺼운 것은 못 만드는데 한국 청와대에서 김철우 박사를 만나면 잘 풀릴 거라고 하여 오늘 여기 같이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가노 사장이 소개한 사람이 뒷날 포스코의 JG 단장으로 오는 아리가 부장이었다. 그도 돕겠다고 했다. 물론 롯데와 제철소는 멀어졌다. 국가 기간산업을 개인 기업에 못 맡긴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윤동석 박사와 최형섭 박사는 나와 친했다. 두 사람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출장 가는 길에 중간기착지인 도쿄에 내리면 나를 찾곤 했다.

1967년 어느 날이었다. 일본 제철소에 연간 10만톤의 철광석을 수출한다는 강원도 함태탄광의 김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수입처에서 불순물을 핑계로 자꾸 가격을 깎으려 덤비니 우리 광석의 성분을 분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사해 보니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슬래그를 부드럽게 해 주는 성분이 높았다. 그가 부탁한 내 이름의 확인서도 발부해 줬다.

이런 인연으로 도쿄에 들어오면 나에게 불고기를 대접해 준 그가 ‘제철소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물론 소규모였다. 빙글빙글 돌려서 쇳물을 만드는 독일의 그룹식 제철법이어야 했다. 일본에는 한 곳이 있었다. 그의 초대를 받아 나는 일본인 전문가 한 명을 데리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약속한 목적지는 강원도 함태탄광. 그런데 그쪽 임원이 아닌 두 사람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익은 쪽은 윤동석 박사, 낯선 쪽은 청와대 경제비서.

나는 윤 박사를 상대했다. 어떻게 알고 나왔느냐, 우리 정보기관이 다 안다. 웬일로 나왔느냐, 각하가 제철소 얘기를 듣고 싶어하신다….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는 거절했다. 함태탄광 일로 약속했으니 거기 먼저 갔다가 시간이 남으면 얘기해 보자고 했다. 마중 나온 임원이 쩔쩔맸다. 우리 일은 나중에 보아도 좋으니 어서 가 보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원도로 먼저 갔다.

그때 청와대로는 가지 않았다. 마침 베트남 대통령의 방한기간이라 박 대통령의 일정이 빡빡했다. 도쿄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서울로 돌아와 동행을 먼저 보내고 남산의 외교구락부로 갔다. 박태준 사장, 박충훈 상공장관, 윤동석 박사, 공항에서 기다리던 경제비서 등과 만났다. 기술문제가 대두됐다. 나는 교육을 시키면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파키스탄 사람보다 한국인이 월등히 빨리 익힐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두뇌의 문제로 보았다.

KISA의 GEP 검토는 나에게도 맡겨졌다. 나는 후지제철소로 가져가 살펴보았다. 문제가 많았다. 기술도 최신이 아니었다. 이런 문제는 포스코에 전달됐다.

한국이 제철소 건설에 일본의 배상금을 쓰기로 하는 과정에 나는 큰 걱정부터 앞세웠다. 대표적으로 그때 인도네시아 정권은 권력자 개인과 정당이 그 돈을 뜯어먹었던 것이다. 나의 염려에 박 사장은 단호히 답했다.

“그런 실례가 있기는 있는데, 내가 맡은 이상 그렇게 못합니다. 김 박사는 나를 잘 모르실 겁니다. 한국에 오셔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나를 아시게 될 겁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박 사장에게 감명을 받았다. ‘이 사람은 믿어도 되겠구나’하고 마음을 놓았다.

1971년 도쿄대학에 휴직을 했다. 박 사장이 나를 포스코로 부른 것이다. 나는 비즈니스에는 소질이 없는 데다 학문의 길로 가겠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기에 휴직을 했던 거고, 박 사장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기술고문인 줄 알고 왔더니 기술담당 상무이사라는 명패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270만톤 계획위원장도 겸했다. 박 사장의 뜻이었다.

몇 안 되는 고국 자랑거리 보고

알량해 보여 가슴 찢어지는 듯

그러나 나는 1973년 졸지에 영어의 몸이 되었다.

북송선을 타고 떠났던 혈육들과 만나기 위해 1970년 북에 다녀온 사실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고, 졸지에 나는 10년형을 선고받아 6년 6개월 지난 1979년 8월 15일 석방되었다. 곧이어 ‘법원의 판결을 무효로 한다’라는 사면복권을 받았다.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모르고 살아온 나의 실수가 그토록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은 분명히 극단적 냉전체제의 비극이었다. 일본 친구들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회복해 도쿄대에 복직한 나는 1980년 완전히 귀국하여 포스코로 돌아갔다. 나로 인해 졸지에 고생한 고향 친척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떳떳해져야 했다.

여든을 헤아리는 지금, 나는 대전에서 재단법인 한국테크노마트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아시아지역의 중견·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적 기술이전기관이다. 1964년에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공학도로서 처음 조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부산의 제일제당, 대구의 제일모직, 영월의 화력발전소 등으로 안내받았다. 기껏 그게 자랑거리인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오늘날의 번영 앞에서 나는 박 대통령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때 냉전체제가 나 같은 사람에게도 기나긴 고생을 강요했지만 말이다.


 

 

당시 재일 교포 4개망 간첩 11명을 검거했다는 경향신문 1973년 6월29일자 기사.. 그리고 아래는 확대한 사진에 김철우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