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사이언스타임즈] 장영실

FERRIMAN 2014. 4. 16. 20:30

노비에서 대호군이 된 과학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3) / 장영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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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의 10전시실(천문과 과학Ⅱ)에 가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자격루가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더구나 이 자격루는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종과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려준다. 즉, 세종 때 만든 것처럼 똑같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07년 11월 남문현 교수가 이끄는 건국대 산학협력단에 의해 복원된 자격루는 물시계라는 아날로그 시스템을 때가 되면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인 디지털 시스템과 접속시킨 자동물시계다. 당시 자격루 복원 소식이 전해지자 로이터통신은 한국 과학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라고 소개했다.

자격루를 만든 이는 세종 때의 과학기술 발전에 앞장선 대표적 과학기술자인 장영실이다. 그에 대한 정황은 1434년(세종 16년) 7월 1일자의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요 임금의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두시고, 대순의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드는 뜻을 본받으시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의상을 제작하여 측후(測候)의 근거를 삼고, 누기를 새로 만들어 시각을 바르게 하여 궁궐 안 서쪽에 각(閣) 세 간을 세우고, 호군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간을 맡는 목인 3신과 12신을 만들어 닭과 사람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 동쪽 간에는 좌(座) 두 층을 마련하여 삼신을 위층에 두되, 하나는 앞에 놓인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고, 하나는 앞에 놓인 북을 쳐서 경을 알리고, 하나는 앞에 놓인 징을 쳐서 점(點)을 알리게 하였다. (중략) 시간이 이를 때마다 여러 신(神)이 문득 응한다. 의상을 참고 연구하매 하늘과 어긋나지 아니하여, 참으로 귀신이 있어 지키는 것 같았으니, 보는 자가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실로 우리 동방의 전고에 없는 거룩한 제도이다.”

 부산대 자연과학대학 앞에 세워진 장영실 동상의 제막식 모습. ⓒ 연합뉴스
부산대 자연과학대학 앞에 세워진 장영실 동상의 제막식 모습. ⓒ 연합뉴스

장영실 이름 앞에 붙은 ‘호군’이란 구체적 관직 없이 월급만 주던 정4품 관직이었다. 그 후 장영실은 종3품인 대호군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장영실은 출생연도 및 사망연도조차 전해지지 않을 만큼 철저히 베일에 가린 삶을 살았다. 그 까닭은 장영실이 조선의 신분계층 중 가장 천한 계급인 노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날짜의 세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인데 성품이 정교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 일을 맡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장영실의 대표적 발명품인 자격루의 물시계는 동아시아 전통의 3단 유입식 물시계를 발전시킨 것이며, 시보장치는 13세기 아랍의 시계기술자 알재재리가 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즉, 장영실은 중국어는 물론 아랍어에도 능통할 만큼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관노가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걸까.

이에 대한 해답은 장영실의 본관인 아산 장씨 족보 속에 숨어 있다. 아산 장씨의 시조인 장서는 중국 송나라의 대장군 출신으로서 고려 예종 때 배를 타고 충남 아산군 인주면으로 망명했다. 그 후 장서는 예종에 의해 아산군으로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아산으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 장(蔣)씨는 모두 아산 장씨인데, 장영실은 장서의 9세손으로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또 족보에는 장영실의 부친이 전서라는 벼슬을 지낸 장성휘로 되어 있다. 전서(典書)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정3품 관직으로서, 중앙 관청의 장관급 직위였다.

부친인 장성휘는 5형제 중 셋째였는데, 나머지 네 형제도 모두 전서 벼슬을 지낼 만큼 명문가였다. 또 아산 장씨의 3세손인 장공수와 장승은 무기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의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5세손인 장득분은 천문지리학을 담당했던 서운관의 책임자를 지냈다. 장영실의 사촌 여동생은 이순지와 더불어 세종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였던김담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장영실이 노비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장영실의 어머니가 기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부친 장성휘가 부산 동래현의 기생과 인연을 맺어서 낳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의 신분제도상 기생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부친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인 계급에 속했기 때문이다.

도천법에 의해 한양으로 가게 돼

당시 부산 동래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었는데 대대로 무기 및 군사와 관련이 깊었던 가문임을 감안할 때 장성휘가 그곳에 파견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그렇게 태어난 장영실은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대의 신분제 실시에 따라 기생인 어머니의 신분을 쫓아 졸지에 동래현 관노로 예속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설은 고려 때 고위직 관리였던 장성휘가 조선 건국 이후 역적으로 몰리면서 장영실과 어머니가 함께 관노가 되었다는 추정이다. 이 추정 역시 장영실이 어릴 때 아버지 밑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은 정황을 설명하기에 무리가 없다. 따라서 장영실이 출생한 연도는 1380년대 초반부터 1390년대 초반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그를 노비로 추락하게 만든 조선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태종 때 시행된 도천법이 바로 그것이다. 도천법이란 각 지방의 능력 있는 인재들을 임금에게 천거하는 제도인데, 관찰사의 추천으로 장영실은 동래에서 한양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장영실은 세종이 즉위하면서 중국으로 유학까지 가게 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1421년(세종 3년) 세종이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내 각종 천문기계를 익혀오라고 명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1년간 머무르다 돌아온 장영실은 1423년(세종 5년)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일용품 및 금은보화 등을 관리하는 관청이었으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지만 월급은 받지 못하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이때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난 그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1년 만인 1424년(세종 6년) 5월 정5품인 행사직으로 승진된 것. 행사직이란 벼슬은 실무는 없지만 월급을 받는 녹관으로서 군부에 속한 직책이었다. 또 144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1438년(세종 20년)에는 종3품인 ‘대호군(大護軍)’에 올랐다.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그가 이렇게 승승장구한 것은 과학기술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