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중앙일보] 공학교육

FERRIMAN 2014. 4. 24. 17:57

입력 2014.04.14 00:10 / 수정 2014.04.14 00:10
 

[시론] 공학교육 혁신해 '세상 구하는 과학자' 만들자

강성모
KAIST 총장
국가대표 육상선수인 두 청년이 있었다. 한 선수는 1등이 되기 위해 달렸고 다른 선수는 자신의 재능을 즐기는 마음으로 뛰었다. 두 선수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해 나란히 금메달을 땄다. 남자 육상 100m 해럴드 아브라함과, 400m 에릭 리델의 실화이자 1981년 개봉한 영화 ‘불의 전차’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나는 아직도 주인공들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승리만 목표했던 선수는 내내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긴 선수는 항상 환희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우리를 끝까지 달리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마음입니다”라는 대사로 볼 때 아마도 신념이었을 것이다. 금메달만 바라보고 달리는 것과 금메달 너머의 가치를 추구하는 신념의 차이 말이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라는 메시지를 우리 공학 교육에 대입해보자. 대한민국 공과대학들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연구해왔는가? 대다수가 세계대학평가나 정부평가에서 상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1등을 위해 달린 선수처럼 ‘금메달’을 위해 연구했다는 뜻이다. 물론 금메달 그 자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노력이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최근 10여 년간 공과대학들이 교수 평가 지표를 SCI 논문 성과 중심으로 강화했고, 그 결과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들이 꾸준히 발표됐다. 톰슨 로이터사의 데이터로 본 한국 2012년 SCI 논문 점유율은 세계 10위다. 2003년 2만755편이었던 것이 4만7066편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재료과학 3위, 컴퓨터과학과 공학이 4위를 차지하는 등 높은 순위에 올랐다. 총 22개 주요 분야 중 9개 분야가 세계 상위 10위권 안에 들었고 나머지 분야도 모두 20위권에 속했다.

 특허 분야도 뒤지지 않는다. 유엔 산하의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발표한 2013년 PCT 국제특허출원 통계를 살펴보면 KAIST가 연구기관 및 교육기관 중 7위에 올랐다. 포스텍과 서울대는 각각 12위와 13위를 차지했다. 캘리포니아공대·MIT·하버드대 등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상위 15위 중 10개를 독식하는 틈바구니에서 의미 있는 선전을 펼친 것이다.

 미국·중국·영국·독일·일본 등 막강한 경제력과 오랜 학문적 토대를 앞세운 강대국 명문대들과 견줄 수준이 됐다는 것은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 대한민국의 공과대학들은 그 너머의 가치를 바라봐야 한다.

 논문과 특허 분야에서 세계 수준으로 경쟁하고 있지만 기술 이전이나 기술 사업화란 종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2년 국내 모든 대학의 기술 이전 수입을 합산한 금액은 약 454억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2011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은 1억9154만 달러(약 2000억원)를 독자적으로 벌어들였다. 1대 1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치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역시나 신념일 것이다. 미국 대학들은 연구 성과를 실질적인 수익으로 만드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공학자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유럽의 많은 대학도 이미 기술 사업화로 발전을 꾀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 공대는 2002년 이래 매년 20개의 창업 기업을 배출하고 있다. 지역에 1만4000개의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10억 유로(약 1조4600억원)가 넘는 수익을 창출해냈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공학자는 무엇을 위해 연구해야 하는가?’ 2005년 작고한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스몰리 교수는 인류가 향후 50년간 직면할 가장 주요한 문제로 에너지·물·음식·환경 등을 꼽았다. 그러곤 ‘과학자가 돼 세상을 구하라(Be a scientist, and save the world)’라고 말했다.

 KAIST는 SCI 논문 중심으로 이뤄지던 교수 평가 지표를 특허와 기술 사업화까지 비중을 다양화할 계획이다. 창업의 실제 수요자인 공학도를 위한 기업가정신 강화 프로그램도 도입할 것이다. 더 나아가 공학자 개인의 발전이 지역과 국가의 발전으로 직결되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과학기술은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과학기술이란 말에서 국가경제를 떠올리지만 앞선 과학 강국들은 세계와 인류라는 가치를 우선시한다. 금메달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삶은 고되고 공허할 수 있다. 세간이 평가하는 숫자나 순위를 신념으로 삼지 말자. 그 너머의 것, 범세계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실용 연구와 가치 창출이 대한민국 공학 교육의 궁극적인 방향이 돼야 한다.

강성모 KAIST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