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광교 it기자단] 박혜선 기자의 일대기

FERRIMAN 2015. 4. 3. 22:43

 

 

52년 전 자취방, 북수동 그 골목길에서
'피플&피플' 박혜선의 사람 중심 행복한 이야기 2015년 01월 29일 (목) l 박혜선 기자l rrozofp@hanmail.net
▲ 화홍문 앞. 사진에서 좌측이 필자

골목에 들어서자 어딘지 낯이 익다. 낮은 지붕 기와집 두 채가 눈에 들어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52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내가 수원 북수동에 살기 시작한 때는 1962년 여름이다. 선친이 경기도 화성 지역으로 직장을 옮기게 됨에 따라 전학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칠남매 중 초등학교 이하는 데리고 계시되, 중고등학교는 수원으로 보내자고 판단하셨다. 자식의 미래를 위한 결단. 큰 딸인 언니가 고1, 둘째인 내가 중2였다. 당시 수원의 여자중고등학교는 수원여중고와 매향여중고 딱 두 곳 뿐. 마침 결원이 있던 매향여중고로 전학을 하게 되면서 북수동 자취생활이 시작 되었다. 북수동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학교 정문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골목과 마주친다. 그 골목에 처마가 낮은 기와집 몇 채가 있었다.

겨울에는 찬바람이 마치 매서운 시어머니 같았다

자취방은 기와집 건넌방이었다. 안방에는 주인 식구가 살았고, 작은 마루를 사이로 건넌방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 안방과 연이어서는 부엌이 있었지만, 건넌방은 담벼락과 잇대어 얹은 슬레이트 지붕 간이 부엌이었다. 비가 오면 사중주, 오중주 연주가 시작 되면서 비가 새어 양동이를 받쳐 놓아야 했고, 겨울에는 찬바람이 마치 매서운 시어머니 같았다. 밥 해 먹는 손등이 벌겋게 부르텄다. 60년대 초 생활이 어찌 여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칠남매에 두 집 살림을 꾸리자니 부모님은 오죽 어려우셨을까. 살고 계시는 인근 바다에 그물을 쳐 모찌(숭어 새끼) 등을 잡아 말려 찬거리를 대어 주기도 하셨지만 우리는 방학만 기다렸다. 갯벌에서 바지락 캐고 굴 따고 그물에 걸린 게도 잡으며 엄마가 지어주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어서였다.

종로 사거리(현재 행궁 광장 앞) 종로교회 대각선 지점에서 조금 내려가면 왜(일본) 간장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쌀이 떨어지거나 반찬이 떨어지면 엄마가 머리에 이고 오시는 식재료 때문에 터미널에서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당시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갓 지은 쌀밥에 날계란 하나 넣고 왜간장으로 간을 맞춰 비벼 먹는 것이었다. 그 때 그 간장 맛이 꿀맛이었다. 거기에 콩나물국이 있으면 화룡점정. 콩나물 3원어치를 사면 한 끼 국을 끓일 수 있었으나 돈이 떨어지면 그것도 어려웠다. 지금의 천원어치 정도의 양이었다. 동생이 '찐 계란 열개 한꺼번에 먹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시절이다.

언니와 나는 소위 맹꽁이(끈 없는)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그나마 내가 학교 갔다 오면 언니가 그 신을 받아 신고 학교를 갔다. 언니가 야간이었기에 가능했는데, 내가 빨리 안 오면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기를 여러 번. 지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벗어 주는 나는 기억에 없으나 당한 자가 기억하는 일이다. 그 뿐 아니라 도시락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리고, 시간 맞춰 갈라는 연탄불을 안 갈아 꺼지게 하는 등 애타게 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열네 살, 철 없을 때다. 자취방 가장은 우리 모두 사회인이 되고 한참 지난 후에야 일화들을 털어 놓았다. 형만 한 아우 없다.

▲ 매향여고 단체사진 (사진 중앙 서희석 교장선생님, 2열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우리가 살던 건넌방은 그야말로 단칸방이었다. 날이 추워지면 검은색 무명천으로 만든 이불을 하루 종일 깔아 놓아 방바닥이 식지 않도록 했는데, 그 이불 한 자락이 온 방을 차지할 정도였으니 꽤나 작은 방이었다. 목화솜을 두둑하게 두어 직접 꿰매 주신 이불 속에서 엄마 냄새를 맡곤 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2월 어느 날, 산드래미에 사는 이종 사촌까지 무려 9명이 한 이불 속에서 잔 적이 있다. 가히 피난 시절을 방불케 했던 밤. 그래도 노느라고 좋기만 했다. 이튿날 아침 아직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동네 확성기에서 뉴스가 나왔다. 고등학교 입학 수석 합격자를 전해주는 방송. “수원여고 ooo!, 매향여고 ooo!”. 일제히 환호하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집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개천가에 사는 1년 반 자취생이 일을 낸 것이다.

추억 속의 시공간으로 52년이 지나서야 들어섰다

북수동 자취생활은 내가 고2가 되면서 막을 내렸다. 선친이 한 동생과 자취를 하게 되면서 나머지 동생들과 우리는 엄마를 모시고 인계동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이후 간간히 북수동 자취방이 어른거리기는 했으나 정작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 추억 속의 시공간으로 52년이 지나서야 들어서고 있다. 골목을 찾기 위해 잠시 망설였다. 큰 길 쪽에서 들어서자니 익숙하지 않다. 동행하던 시민기자께서 다시 지은 건물이 많다고 귀띔해준다.

둘러보니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은 집이 많다. 그래도 아주 낯설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고도제한을 받아 높게 지은 집들이 없어서인 듯싶다. 겨우 비슷한 골목을 찾아 들어서니 어딘지 낯이 익다. 삐뚤빼뚤한 골목이다. 길지는 않았지만 워낙 삐뚤빼뚤해서 골목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변태성욕자가 출현해 놀래기도 했던 골목이었다.

기와집 두 채가 눈에 들어온다. 처마가 워낙 낮아 담벼락 높이와 맞 닿아 있고 진녹색 철 대문이 눈에 익다. 당시 그 집도 철 대문 이었다. 좁은 안마당에 펌프와 함께 작은 장독대가 있었는데, 도통 들여다 볼 수가 없어 확인이 불가능했다. 두 집 중 왼편의 집이 맞는 것 같았다. 대문에 손을 얹고 한참을 서 있었다. 다시 학교 쪽으로 골목 끝까지 나가 화홍문을 바라보았다. 미술 시간에 무던히도 그렸던 일곱 개의 둥근 원 속에서 소살소살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예전 그대로다. 올려다보니 방화수류정도 그대로 서 있다. 가로등이 가로수 그림자를 길게 지어내고 있었다.

이번에 돌아본 곳은 행궁동 내에 있는 남창동, 신풍동, 북수동 등 법정동 세 지역이다. 남창동은 화려(?)했다. 나름 거리가 깔끔하고 갖가지 먹을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카페가 많아 행궁을 찾는 이들이 들러 가기에 좋을 거리였다. 반면, 신풍동 주택가는 밤에 혼자 걷기는 무서움이 들 정도로 한적했다. 큰길가로는 잘 정비된 간판들이 즐비했지만 역시 한가한 모습. 지난 해 ‘생태교통’ 행사에서 차 없는 거리를 한 달간 운영하며 투입된 예산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에 비해 북수동은 확연히 달랐다. 큰길가 건물 외벽에 국외 작가가 그린 큰 벽화가 눈에 띈 것과 전시 공간으로 자리한 ‘대안’을 제외하면 옛날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반백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모습이 마치 ‘城’안에 갇혀 미라가 된 것일까 싶다.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 착시가 일어났다. 북수동은 城에 갇히고, 수원은 거대한 콘크리트 회색 벽에 갇혀 있다. 당시 수원의 인구는 60만 명 정도였다.

열네 살 자취생이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사십여 년 공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 온 세월. 대학 진학 꿈은 주경야독하며 이루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년 과정에서부터 출발해 대학원 공부까지의 느린 학습 세월이 무려 이십여 년이다. 꿈이었던 법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공직 수행에 도움이 될 행정, 경영, 사회복지 등을 두루 공부하며 이론과 실제를 겸하고자 노력했기에 후회는 없다. 퇴직 후에는 문학, 음악, 미술 분야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시니어 기자로, 시니어 합창단 활동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52년 전 자취방’이 나를 응원한다. 확성기에서 나오던 그 울림이다. 평생학습을 지향하는 동기부여 매체는 바로 ‘북수동 확성기 뉴스’였다.

박혜선 기자 rrozof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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