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중앙일보] R&D 정책

FERRIMAN 2015. 4. 20. 23:10

입력 2015.04.16 00:07 / 수정 2015.04.16 00:26

[시론] 정부 R&D의 패러다임 전환할 때다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정부의 산업 정책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기업의 연구개발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가능한 한 줄여 나가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는 대개 단기적인 것으로, 정부가 지원하지 않아도 기업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부가 10대 핵심 소재 사업의 하나로 집중 지원키로 한 리튬이온 배터리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 지원이 한쪽으로 쏠리면 지원받지 못한 많은 기업은 불리한 처지에서 경쟁하므로 공정경쟁을 저해한다. 만일 어떤 기업이 1억원의 기술 개발 자금을 지원받았다면 지원받지 못한 기업은 1억원을 벌기 위해 50억원 정도의 매출액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중소기업들로선 매출 50억원 늘리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다 정부가 지원한다고 연구가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것도 아니다. 기술 개발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력이다. 미래 지향적 연구는 죽기 살기로 해야 성공 가능성이 있는데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는 연구의지가 약해 성공 가능성이 낮아지기 일쑤다. 예를 들어 비행기의 경우도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천문학자 랭글리의 비행기는 강물에 처박혀 실패했으며, 오히려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비행기는 세계 최초로 하늘을 훨훨 날았다.

 정부가 지원하는 경우 흔히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평가 선정 과정에 전문성과 책임성이 없어 엉뚱한 기업이 선정되거나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평가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R&D) 자금이 줄줄 새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 정부 돈은 눈먼 돈이라는 말이 생겨난 배경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정말 잘해야 하는 것은 민간이 할 수 없는 국가과제 연구다. 여기에는 무기개발, 우주항공, 과학 수사, 일기 예보 같은 것이 있다. 어떤 기술을 국가가 주도해서 개발할 것인가는 국민, 정부, 국회가 참여해 우선순위를 정하는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다. 정부는 부처별로 국가적으로 기술을 개발해야 할 분야의 예산을 확보한 뒤 책임을 지고 기술 개발을 주도해야 하며, 이 과정에 민간의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은 기업의 연구개발에 관여하기보다 전략적으로 선택한 국가과제를 잘 수행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는 이런 국가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정부의 무기 개발 과정에서 수많은 방위산업 비리가 터져 나왔다. 실제로 홍상어를 비롯해 K시리즈 무기들이 개발 당시 시험발사에는 성공했으나 현장 배치 후에는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무기 개발은 국방부의 프로젝트이므로 국방부 장관이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하고, 관련 연구원들이 애국적 사명감을 가지고 치밀한 연구개발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게 중요하다.

 국가과제가 아니면서 정부가 관심을 두어야 할 분야는 대학 등에서 수행하는 기초연구다. 기초연구는 상업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정부가 지원해야 하는데 미국도 이 부분에 국가 예산의 4% 정도를 쓰고 있다. 같은 비율로 한다면 우리도 1조원 정도 예산을 책정해 대학 및 연구소의 기초연구에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초연구의 치명적 약점은 과연 좋은 결과가 나올지, 그리고 연구 결과가 어디에 쓰일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높은 ‘구름 잡는’ 식이란 점이다. 그래서 외국의 한 대학 교수는 기초연구를 ‘쓸모 없는 지식의 유용성’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이런 기초연구를 결코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쓸모없을지 몰라도 10~20년 후에 유용성을 찾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아무리 불확실성이 높아도 하고 싶은 연구자가 나타나면 과감히 지원하고, 일부만 건져도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한다.

 과연 우리나라 실정에 맞춰 정부가 과감하게 지원해야 할 기초연구는 무엇일까. 우선 막대한 돈이 투입되는 대형 기초연구는 지양하는 게 좋다. 될 수 있는 대로 보다 다양한 기초연구로 저변을 넓히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미래가 불확실한 기초연구에 ‘선택과 집중’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2017년까지 6조5000억원을 투입한다는 기초과학연구원의 청사진도 바람직한 전략이라 말하기 힘들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부 R&D 자금은 국내총생산(GDP) 대비로는 세계 1위이고, 규모는 세계 6위다. 하지만 이런 전력 투구에 비해 여전히 개발 성과는 초라한 수준이다. 그 중요한 이유가 바로 정부의 R&D 정책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성격으로 R&D 자금을 배분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 정책의 방향을 R&D 보조금 중심에서 정부가 연구결과에 책임을 지는 국가과제 중심의 연구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