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칼럼에 어울리게 삶의 향기 나는 글을 쓰고 싶건만 필자의 감성이 메말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각박한 현실 때문인지, 예전같이 촉촉한 글을 쓰기 어려움을 가끔 한탄한다. 현실의 진짜 삶은 아름다운 향기뿐만 아니라 고통의 향기까지 함께 섞여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아련한 허전함이 있다.
이를테면 ‘해마다 가을이 오면’ 같은 표현 뒤에 ‘가을의 정취와 옛 추억에 젖는다’류의 문장을 연결시킬 수 있다면 좋겠건만, 위기의 시대를 사는 탓일까, ‘해마다 가을이 오면’ 다음에 ‘발표되는 자살률 통계에 긴장한다’라는 딱딱한 이야기를 잇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하긴 연간 1만4000명 가까운 자살자가 발생하는 이 현실이 위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여러 연구 주제 중 하나가 자살 예방인 이유로, 전년도 사망 원인 통계가 발표되는 가을이 오면 다른 자살 문제 전문가·연구자와 마찬가지로 긴장해 예의 주시한다.
지난달 발표된 2015년 자살 관련 통계를 살펴보면 전년에 비해 자살자 수는 1만3836명에서 1만3513명으로 2.3% 줄어들어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로 나타내는 자살률은 25.8로 소폭 감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자살률 12.0에 비해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 연령층에서 자살이 감소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인 노인 자살은 더욱 증가해 70대 자살은 오히려 8.5%, 80대 자살은 6.4% 증가했다는 점에서 조금 낮아진 전체 추세에 안심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 분석과 대책까지 논하지는 않겠으나 이 주제 연구자로서의 개인적 느낌은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자살 문제의 심각성에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둔감해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자살 통계 발표 직후 보이던 경각심은 점차 희미해져 마치 높은 자살률이 당연한 듯한 무관심이 팽배해지고 있다. 높은 자살률 자체도 문제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생명의 소중함에 둔감해진 우리 사회의 반응이다.
문제 해결에 충분히 앞장서지 않는 정치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간헐적인 관심을 넘어 이 문제를 끝까지 해결할 의지를 가진 의원 하나가 없단 말인가? 더구나 자살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아야 함이 상식이건만 집권당 대표가 합리적 과정 대신 죽겠다는 선언을 하고 유력한 야권 대표가 한강 투신을 언급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며, 이 시대 책임성을 가져야 할 정치인들의 모습에 정치적 입장을 떠나 자살 예방 관점에서 실망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폭력에 의한 안타까운 죽음을 병사로 규정하는 의사의 판단을 보며, 자살이 광범위한 사회문제로 인한 ‘외인사’임을 외면하고 개인 차원의 ‘병사’인 듯 인식하는 태도를 가슴 아프게 연결 짓게 된다.
모든 책임이 정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십수 년째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는 심각한 상황에서 자살 문제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부서가 부재함이 말이 되는가. 보건복지부 담당부서에는 불과 담당자 2명이 열악한 예산을 가지고 이 거대한 문제에 대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그것도 자살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업무까지 함께 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정부 인식이 이러하다.
우리보다 훨씬 높았던 일본의 자살률을 2002년 우리가 앞지르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자살 예방 예산을 배정하고 후생성 산하 자살 담당부서를 범정부 차원 대책을 위해 내각부로 옮겨 대응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살 문제 해결 한·일전이라도 열어 해결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라도 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축구 한·일전에 관심을 가지듯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OECD 자살률 1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OECD 탈퇴뿐인 듯 보인다는 자조 섞인 한탄을 하기도 한다. 자살률만 낮추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출산율·노인빈곤율·삶의 질 등 많은 문제와 연결돼 있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게 궁극적 목표여야 한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자살률 통계에 마음 졸이지 않는, 그리하여 가을 남자의 감성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가을은 언제쯤 올까.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