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식빵 언니’ 통쾌한 ‘마법 검객’…국민 시름 날렸네
입력 2016-12-29 00:44:40
수정 2016-12-29 01:13:34
2016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청와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파문은 대한민국 스포츠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야 할 스포츠가 비선세력들의 놀이터로 전락했고, 그들의 사익 추구 수단이 돼버렸다. 그렇지만 스포츠 선수들은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땀과 눈물을 쏟으며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사했다. 중앙일보는 2016년 한 해를 마감하면서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가장 빛났던 별들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비록 시상식이나 트로피는 없지만 최선을 다했던 선수들에게 큰 박수로 고마움을 전한다. 지면으로 대신하는 이 상은 이름하여 ‘2016 스포츠스타 아~주 칭찬해 어워드’다.
2016년은 ‘쎈 언니’ 전성시대였다. 대중들은 ‘쎈 언니’한테 열광했는데, 그런 현상은 ‘걸(Gir·소녀)’과 ‘크러시온(Crush on·반하다)’을 합성한 ‘걸크러시’란 단어의 유행으로 나타났다. 스포츠계도 ‘걸크러시’ 열풍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배구여제’ 김연경(28·페네르바체)이 ‘걸크러시’ 현상의 대표주자였다. 지난 8월 리우 올림픽 예선 일본전에서 김연경은 30점을 뽑아내며 승리를 이끌었다. 김연경은 경기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뜻대로 안될 때 무의식적으로 비속어를 내뱉었다. 입 모양이 고스란히 TV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비난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팬들은 김연경의 강한 승부 근성에 오히려 매료됐다. 찬사도 이어졌다. 팀원의 실수를 따끔하게 질책하는 ‘쎈 언니’인 동시에 눈물 흘리는 후배를 다독이는 선배였다. 팬들은 그런 김연경의 모습에 열광했다.
터키 리그 휴식기를 맞아 지난 22일 귀국한 김연경을 공항으로 마중나온 팬들도 대부분 10~20대 여성이었다. 그들은 김연경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했다. 김연경은 “사람들이 ‘걸크러시, 걸크러시’ 그러길래 처음엔 걸그룹 이름인 줄 알았다. 늘 SNS로 많이 응원해줘서 힘이 난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김연경은 또 “올림픽이 끝난 뒤 어머니와 ‘식빵굽기’(비슷한 발음의 욕설을 내뱉는 것)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그의 승부 근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김연경은 “어머니가 경기 장면을 꼼꼼히 챙겨보신다. (욕설 사용을) 줄여보려고 노력했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욕설을 자제한 것 같긴 한데 경기에만 집중하다보니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는 40년 만의 올림픽 메달에 도전했다. 경기 출전 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지만 김연경은 팀의 통역과 주무 역할까지 맡았다. 아쉽게도 8강에서 탈락했지만 팬들은 대한배구협회의 열악한 지원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김연경과 여자배구를 향해 큰 박수를 보냈다. 김연경은 “이런 사정이라면 8강도 나쁜 성적이 아니다.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갖춰야 경쟁력이 생긴다”며 협회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김연경은 일주일간의 휴식을 끝내고 28일 터키로 돌아갔다. 그는 “올해 부상(복근파열)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여러분들의 사랑 덕분에 행복했다. (2016~17시즌) 후반기에는 터키 컵대회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할 수 있다.” 박상영(21·한국체대)은 이 한마디로 올해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리우 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결승전. 박상영은 경기 막판 10-14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모두가 포기하던 그 때, 박상영은 “할 수 있다”를 되뇌었다. 이 말은 마법의 주문이었다. 박상영은 마지막 47초 동안 내리 5점을 뽑아냈다. 결국 15-14로 역전 우승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그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라고 주문을 걸었더니 조금씩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세계랭킹 21위였던 박상영은 올 시즌을 세계랭킹 1위로 마무리했다.
한국의 간판 공격수 손흥민(24·토트넘)은 올 여름까지는 뜨거운 감자였다. 지난해 아시아 선수 중 가장 높은 이적료(2200만파운드·약 327억원)를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에 입성했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28경기에서 4골에 그쳤던 손흥민은 올시즌 초반 완전히 달라졌다. 9월에만 4골, 도움 1개를 올려 아시아 선수 최초로 ‘EPL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 좌우를 가리지 않았고, 발과 머리로 잇따라 골을 터뜨렸다. 최근 들어 피로누적으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손흥민은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14경기에 출전해 5골을 기록 중이다. 손흥민은 또 올림픽 대표팀과 A대표팀을 오가면서 맹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국내 축구팬이 뽑은 ‘올해 최고의 공격수’에 이름을 올렸다.
박인비(28·KB금융그룹)는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허리와 손가락 부상으로 4월 이후 대부분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올림픽 전초전으로 나간 국내여자투어 삼다수오픈에선 컷 탈락했다. “욕심 부리다 올림픽 출전권만 날리는 것 아니냐”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박인비는 특유의 뚝심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116년 만에 올림픽으로 돌아온 골프에서 따낸 금메달. 여자골프 메이저 대회를 석권한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올림픽 금메달까지 보태면서 박인비는 커리어 골든슬램을 달성했다.
오승환(34·세인트루이스)은 묵직한 돌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메이저리그를 사로잡았다. 셋업맨으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중반부터 부진한 트레버 로젠탈을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시즌 성적은 19세이브(6승3패), 14홀드, 평균자책점 1.92. 한국·일본에 이어 ‘야구의 고향’ 미국에서도 특급 마무리로 인정받으면서 오승환의 주가는 날로 치솟고 있다. 오승환의 성인 ‘오(Oh)’를 딴 신조어 ‘게임 오(oh)버’ ‘오케이(Oh-K)’ ‘스트라이크 오트(Strike Oht)’ 등이 생겨났고, 한국에서 건너간 별명 ‘돌부처(스톤 붓다·Stone Buddha)’도 인기를 모았다.
손연재(22·연세대)는 리우 올림픽 리듬체조 개인종합에서 4위를 했다. 준비했던 연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전 종목 18점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리듬체조 강국 러시아 등 동유럽 선수들을 넘지 못했다. ‘한국 리듬체조 첫 올림픽 메달’이라는 부담을 짊어졌던 손연재는 경기 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손연재는 “(런던 올림픽 5위 이후) 4년동안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점수를 매긴다면 내게 100점을 주고 싶다”고 당시 소회를 밝혔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혼신을 다한 그에게 팬들이 보낸 ‘울지마 연재야!’ ‘충분히 아름다웠다’ 등의 응원글이 넘쳐났다.
박태환(27·인천시청)은 올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지난 2014년 9월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국제수영연맹의 징계을 받았던 그는 지난 3월 복귀했다. 하지만 리우 올림픽 출전을 놓고 대한체육회와 갈등을 빚었고, 우여곡절 끝에 나간 리우 올림픽에선 전 종목 예선 탈락했다. 추억 속의 수영스타로 남을 뻔했던 박태환은 올림픽 이후 초심으로 돌아갔다. 혹독한 호주 전지훈련을 소화하면서 지난달 보기좋게 부활했다. 11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4관왕, 12월 쇼트코스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3관왕에 올랐다. 박태환은 “인생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을 쳤다. 올 한해 배운게 많다”고 했다.
김효경·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