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코리아] 국가 R&D 선정부터 상용화까지, 기업이 이끌게 하자
입력 2017-04-10 02:34:12
수정 2017-04-13 20:05:44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이 2013년 11월 무인 발레 주차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2013년 11월 스마트폰으로 자동차를 주차하고, 주차된 자동차를 사용자가 내렸던 위치까지 호출할 수 있는 ‘무인 발레 주차’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차량에 장착된 5개의 카메라 센서와 10여 개의 초음파 센서를 바탕으로 한 이 기술이 향후 완전 자동주차 시대를 열 것이라고 ETRI는 설명했다.
후속 과제 연구를 통해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이 기술을 무인 셔틀에 탑재해 운용하는 게 목표라는 말도 덧붙였다. 2010년 당시 지식경제부가 산업원천기술개발사업의 목적으로 제시한 164개국 연구개발(R&D) 과제 중 하나였으며 4년간 총 64억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 기술은 개발 성공 뒤 3년이 넘은 최근까지 ETRI 연구실 캐비닛에서 잠을 자고 있다. 성우모바일을 비롯한 5개 중소기업에서 ETRI 기술을 전수해 LG전자와 함께 모듈 양산을 하려 했으나 LG전자의 담당 임원이 바뀌면서 중단됐다. 그사이 무인 발레 주차 기술이 필요한 현대자동차는 2010년부터 자체적으로 자사 양산 차량에 단계적으로 도입했으며 최근 ETRI 수준의 무인 발레 주차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
ETRI 사업화본부장을 지낸 현창희 연구위원은 “연구 기획 단계부터 기술이 필요한 기업의 참여가 있었다면 혈세 수십억원이 들어간 국책 연구과제가 헛일이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TRI의 무인 발레 주차는 연간 19조원이 넘는 세금을 쏟아붓고도 제대로 된 성장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 R&D의 대표 사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한국의 국가 R&D 투자는 세계 1위 수준이다. 하지만 투자에 대한 성과는 기대치를 한참 못 미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이런 모습을 ‘코리아 R&D 패러독스’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한국의 과학기술 수용성(새 기술을 흡수해 활용하는 능력) 평가지수는 2012년 세계 180개국 중 18위였으나 지난해에는 28위로 10계단이나 내려앉았다. 기업혁신지수 역시 2012년 14위에서 지난해 20위로 떨어졌다.
게다가 국가 R&D 과제는 2011년 4만1600건에서 2015년 5만4400건으로 해가 갈수록 잘게 쪼개지고 있다. R&D에 선택과 집중이 이뤄지지 않고 나눠 먹기식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얘기다. 가짓수가 늘어나다 보니 관리·감독할 눈도 덩달아 많아지고 있다. 한국연구재단과 같은 연구 관리를 위한 전담기관 수는 2009년 10개에서 지난해 22개로 배 이상 늘어났고, 같은 기간 예산도 1조1900억원에서 2조400억원으로 71.4%나 불어났다.
국가 R&D 과제 갈수록 나눠 먹기식 변질
원인이 뭘까. 전문가들은 국가 R&D의 큰 문제점으로 ‘관치(官治)’를 꼽는다. ‘ETRI의 무인 발레 주차’처럼 응용개발 기술에 대한 국가 R&D 과제 기획·선정에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국가 R&D는 관(官)이 주도해 큰 그림을 그리고 나면 산하에 있는 연구 관리 전담기관이 교수와 연구원 등을 불러 모아 세부 과제를 정하고 여기에 출연연구소와 대학·기업 등이 응모해 과제를 따내는 방식이다.
지난해 8월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 주재로 제2차 과학기술전략회의를 열고 인공지능(AI) 육성 방안 등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질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는 단 2개월 동안 산하기관들을 쪼아 급조해 만든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며 “기업의 의견도 전문가의 식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 위원들은 한 나라의 신성장엔진을 발굴하기 위한 국가 R&D가 이 같은 비효율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한국은 거세게 밀려오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넘어설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김태유(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분과장은 “정부가 어젠다를 선정한 뒤 연구 아이템을 공모하는 방식이 여전하다”며 “국가 연구개발 기획과 과제 선정에 기초·원천 연구는 제쳐 놓더라도 응용개발 기술 연구개발만이라도 기술이 필요한 기업이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영주 한국화학연구원 본부장은 “정부의 연구개발 평가 관행이 양적·단기 성과 위주이기 때문에 연구 성과의 상용화보다는 연구 과제 수주와 논문·특허에만 몰두하는 구조가 돼 버렸다”며 “정부의 예산 지원도 기술 개발이 상용화로 이어질 수 있는 단계까지 지속돼야 한다”고 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연구개발 지원에 대기업을 배제한다든지 실업이 우려되는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이 빠지는 등 정무적 요인이 끼어드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다 보니 나눠 먹기식의 형식적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는 “정부가 앞에서 이끌려 하지 말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민간이 주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R&D 양적평가 관행에 논문만 양산
중앙일보·JTBC의 시민 의견수렴 사이트 ‘시민 마이크’에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보여 주기에 급급한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이 문제인 겁니다. 관료주의가 연구개발 분야에도 만연하다는 뜻이겠죠”(김민****), “공적 자금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도둑놈들이 많아서 그렇겠지요”(Rowa***), “정권이 바뀔 때나 알파고 같은 것 등 분위기에 휩쓸려 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baef****), “자본을 가진 대기업과 투자자들이 단기 성과나 자체 투자에만 급급하지 않고 멀리 내다보고 투자하는 생태계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연구개발에 지금보다 많은 돈을 쏟아부은들 결코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겁니다”(offr***), “기간이 오래 소요되고 막대한 투자를 요하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는 국가 주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기술 개발 등 응용 분야 연구는 해당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 등이 담당하는 것이 맞다.”(박기*****)
최준호 기자·이영민(이화여대 언론정보학 4) 인턴기자 joo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