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맹아(聾盲啞)라는 장애를 극복한 미국의 저술가·사회사업가 헬렌 켈러(1880~1968)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 결론이 항상 기분 좋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헬렌 켈러의 말은 설득력이 상당하다. 각종 기사에 달린 댓글을 유심히 살펴보면, 스스로 생각해 창의적인 결론을 내린 경우는 10%도 안 되는 것 같다. 남이 내린 결론을 앵무새처럼 복사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생각을 남들에게 떠넘긴다.
변화라는 주제로 우리가 생각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곧 죽는다"고 한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 속설은 그만큼 변화가 힘들다는 걸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 그리고 변화를 거부하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한다.
심리학자들을 비롯한 변화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변화가 힘든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 의외로 우리에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 상황에 대해 불만도 있지만, 지금 이대로가 나름 편안하다. 변화했을 때 어떻게 될지 두렵다. 우리는 일단 마음을 정한 다음에는 마음을 잘 안 바꾸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인 동물이다. 이성을 따라야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의 노예로 살아간다.
여기에서 ‘우리’를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 정치’로 바꿔보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변화의 어려움은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 차원에서도 우리를 힘들게 한다. 1980, 1990년대에 민주화를 이룩한 우리나라는 왜 정치발전이 제자리걸음일까. 왜 후진국형 장면을 TV에서 봐야 할까. 군부 독재를 극복한 것으로 알았는데 ‘독재자’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일단 화를 내면 안 된다. 호기심을 가지고 상대편과 대화해야 한다. 상대편을 이겨보겠다는 게 대화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역효과를 볼 수 있다. ‘내가 옳다, 네가 옳다’를 따지는 게 아니라 서로 배우겠다, 서로 공감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상대편을 너무 몰아세우면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이 흔들릴수록 겉으로는 더 강경해지는 경향이 있다. 신념과 의견은 그들 정체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소속감이 생긴다. 진리나 진실 못지않게 소속감이 중요하다. 소속감을 보장하는 그룹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사람은 잘못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편이 명백한 잘못에 빠져있을수록 상대편의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
객관적인 사실·팩트를 확보해 상대편에게 들이밀면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상대편 또한 사실·팩트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탈원전이건 남북·북미대화건 천안함이건 세월호건 광주민주화운동이건 모두 그렇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라는 주장에 대해 ‘신화 다 거짓말이다’라는 관점이 있다. 또한 나만 잘 먹고 잘 사면 되는 데 남의 변화를 걱정하느냐는 의견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으로 연예인 걱정, 국가와 민족, 정치에 대한 걱정이 손꼽힌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오지랖이 너무 넓다.
우리가 선사시대부터 본능적으로 아는 게 있다. 내가 속한 씨족·부족·민족이 잘 돼야 내가 사는 게 편하다는, 수만 년 동안 확인된 진리다. 우리는 공동운명체에 속한다. 우리나라가 잘 돼야 하다못해 외국으로 여행 갔을 때 대접받는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곧 죽는다"고 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은 바뀌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도 성립한다. 북한이 최근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은 ‘북한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관점에 힘을 실어줬다. 반면 ‘북한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관점도 있다. 앞으로 북한이 어떻게 변화할지 주목된다.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