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엔 없는 돌"..가락국 허황후 '파사석탑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 기자 입력 2019.12.17 06:00 수정 2019.12.17 09:50
[경향신문]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돌이라면….’ ‘가야본성’ 특별전이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아주 괴이하게 생긴 돌을 6층으로 쌓아놓은 탑이 하나 서있다. 이름하여 파사석탑(경남 문화재자료 제227호)이다. 원래 경남 김해의 허황후릉 한편에 서있었던 것을 전시와 보존처리 등을 위해 이번에 옮겨왔다.
■신비로운 돌탑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 산학협력단에 이 탑의 산지와 특성을 분석 의뢰했더니 흥미로운 결과보고서(<김해 파사석탑의 암석학적 특성분석 및 산지 추정 분석 결과보고서>)가 나왔다. 대자율(암석이 지니는 자성)과 X-선 형광, 적외선 분광 등 비파괴분석으로 들여다보니 1~6층의 재질은 상당량의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이라는 것이다. 또 이 석탑의 돌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데 이것은 고온의 열수 관입에 의한 층리 또는 균열에 따라 적철석이 불규칙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엽랍석은 주로 고온성 산성 열수(약 200~300도)로 생성된 2차 변질 광물이다.
연구를 책임진 조호영 고려대 교수(지구환경과학과)는 “정확한 암석분석을 위해서는 현미경 관찰 등 구성광물의 검증이 요구된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파사석탑에 사용된 암석의 산출지를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엽랍석은 원래 경남 밀양이나 전남 완도군 노화도가 대표적인 산출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암석과 파사석탑의 재질을 비교해본 결과 일치되지 않았다. 파사석탑은 퇴적암(사암)이지만 밀양과 노화도의 암석은 화산암이거나 화산암 기원의 암석이기 때문이다.
고려대팀은 “대표적인 엽랍석 산출지는 일본 동부와 중국 동남부(푸젠성·福建省 및 저장성·浙江省), 베트남 북부지역 등”이라고 첨언했다. 지금까지 파사석탑의 암석을 두고는 ‘탄산염 각력암’ 또는 ‘붉은색 대리암’ 등이 거론돼왔다. 하지만 이번 비파괴조사 결과 각력암이 아니라 엽랍석 성분의 사암으로 드러난 것이다. 또 하나 석탑의 부재 돌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부재 아랫부분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와 출목(서까래를 바치려고 기둥열 밖으로 빠져나온 나무)의 흔적이 역력했다. 가장 아랫단은 한 면에 4개씩, 그 이상의 부재에도 나타나 있다. 탑을 조성하면서 조각한 것이 분명하다.
■“수로왕 당신이 직접 맞이하라”고 호통친 16살 공주
궁금증이 생긴다. 우선 파사석탑이 무엇이기에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일까.
“금관(金官·김해) 호계사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 황옥이 동한(중국) 건무 24년(기원후 48년)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
대체 무슨 곡절이 있었던 걸까. 기원전 48년 5월 어느 날 서역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은 부왕의 부름을 받았다. 부모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얘야. 어젯밤 꿈에 황천(皇天)이 나타나 ‘가락국의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낸 왕인데, 아직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다. 경들은 공주를 시집보내라’고 말씀하셨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16살 공주는 군말없이 수행원인 신보와 조광 부부를 비롯해 시종 20여명을 이끌고 가락국행 배를 탔다. 배에는 금수능라(錦繡綾羅·수놓은 비단)와 의상필단(衣裳疋緞·비단 옷)·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을 잔뜩 실었다. 부모가 이역만리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가는 딸을 위해 마련한 혼수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락국행 배가 파도신의 노여움, 즉 거센 풍랑 때문에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공주가 아버지에게 돌아와 자조치종을 말하자 부왕이 ‘이것을 가져가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파사석탑이다. 과연 파사석탑을 배에 실으니 파도가 잠잠해졌다. 7월27일 두 달 여 간의 항해 끝에 공주를 태운 배가 가락국 금관(김해) 앞바다에 닿았다. 마침 가락국 수로왕은 구간(九干·토착세력인 아홉 부족의 수장)이 권하는 혼인처를 거절하고 ‘하늘이 점지해준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로왕은 공주가 도착하자 구간을 보내 맞이했지만 공주는 “내가 누군지 알고 따라가겠느냐”고 호통을 쳤다. ‘왜 부하들을 보내냐. 수로왕 당신이 직접 와서 신부를 맞이하라’는 16살 공주의 서슬퍼런 요구였다. …수로왕은 찔끔하면서 직접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는 그제서야 수로왕의 손을 잡았다. 수로왕 부부는 임시궁궐을 마련해서 2박3일간의 허니문을 즐긴 뒤 대궐로 돌아왔다.
■삼국유사 만의 멋
알려지다시피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일연 스님의 설명대로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대의 대강(요나라 도종의 연호·1075~1085) 연간에 금관지주사 문인(文人·사람 이름인지 문인 중 한사람 인지 알 수 없음)이 편찬한 <가락국 본기>를 요약한 것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금관국 파사석탑’조에서 “(허황후 설화와 불교 전래 이야기를 자세히 서술한 뒤)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나와있다”고 부연설명했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해서 그 지역에서 전래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담았다. 궁중에서 역사적 사실 만을 토대로 편찬한 정사(<삼국사기>)와는 또 다른 <삼국유사>의 맛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육당 최남선은 “만약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중 하나를 택하라면 마땅히 삼국유사를 택하겠다”고 하면서 “조선의 생활과 문화의 원두(元頭)이자 고형(古形)은 이 책(<삼국유사>) 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평가한바 있다.
일연 스님은 허황후의 설화를 전하는 김해 현장을 방문해서 파사석탑을 친견했던 것 같다. 일연 스님이 표현한 파사석탑의 모습을 읽어보라.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700여 년 전 일연 스님이 파사석탑을 친견한 뒤의 소감인데 어떤가. 신기하지 않은가. 돌에 붉은 색이 돌고, 석질이 무르며,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돌이라는 것은 고려대 산학협력단의 잠정 분석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래와 도입 사이
가야에는 언제 불교가 도입되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삼국의 불교 도입 시기는 고구려의 경우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고,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했다는 372~375년, 백제는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온 침류왕 즉위년(384년), 신라는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들어와 모례의 집에 머문 눌지왕 연간(417~458)이다.
이 대목에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단순 전래와 정식 도입은 다르다는 것이다.
“수로왕이 공주를 맞이하고 함께 150여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는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상교(像敎·불상과 교법)를 받드는 일이 없었다.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해서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상교는 사찰의 건립과 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허황후 황옥이 파사석탑을 가져왔지만 불상이나 경전을 갖고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절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허황후가 도래한 기원후 1세기의 인도에서는 불상의 보급이나 불경의 문자화가 이뤄지기 이전의 시기였다. 따라서 가야국 성립 초기에는 불교가 널리 보급될만큼 혹은 절을 지을만큼의 조건, 즉 불상과 경전이 유입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던가, 가야 백성들이 불교 자체를 몰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1세기(기원후 48년?)지만, 정식으로 도입된 시기는 452년일 수 있다.
■평형석인가 석탑인가
물론 허황후가 배에 실은 것은 석탑이 아니라 배의 전복을 막기위해 실은 평형석이었을 수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허황후를 태운 배가 거센 풍랑 때문에 나가지 못하자 허황후의 부모가 실은 것이 파사석탑이었고, 그 덕분에 두 달 여의 항해를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19세기초 이학규(1770~1835)의 문집인 <낙하생집>에는 “허황옥이 처음 올 때 큰 배에 돌을 실어 뒤집어지지 않게 하였다. 파사탑이 있는 곳을 물었더니 어찌 울창한 숲에 있느냐”는 오언절구가 나와있다. 이학규는 파사석탑이 서있던 호계사가 폐사되고 석탑이 숲속에 방치되고 있음을 목격한 뒤 이런 오언절구를 남긴 것이다.
이학규의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파사석탑이 원래는 평형석의 용도로 배에 실렸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만약 처음부터 파사석탑을 실었다면 <가락국기> ‘수로왕조’에 허황후가 가져온 혼수품 목록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락국기>에 실린 혼수품에는 ‘금수능라’와 ‘의상필단’, ‘금은주옥’, ‘구슬 장신구’ 등만 서술되어 있다. 허황후가 가져온 것은 평형석으로 쓰인 인도산 돌덩어리일 가능성이 짙다.
■발품 팔아 쓴 <삼국유사>
그랬다가 이 평형석은 가야 백성들이 불교를 믿게되면서 언젠가인지는 모르지만 불탑으로 조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누누이 강조하자면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어영부영 쓰지 않았다. 정사인 <삼국사기>(142종)보다 훨씬 많은 문헌(185종)을 인용했을 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엔 현장을 직접 답사했다.
그런 일연 스님이 김해지방을 답사하고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허황후 때(기원후 48년)이지만 파사석탑을 모신 사찰(호계사)과 왕후사를 창건한 시기가 제8대 질지왕 2년(452년)”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게다가 일연 스님은 현장답사 후 다음과 같은 소감시를 남겼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1000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아무렴 현장까지 답사한 일연 스님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썼겠는가. 뭔가 근거가 있으니까 절과 파사석탑 이야기를 연대까지 정확하게 짚어 언급했을 것이다.
■불교의 흔적
아직까지 가야에 불교가 도입되었다는 고고학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고령 송림리 대가야 토기 가마에서 연꽃무늬가 장식된 완형의 기와가 출토됐다. 고령 지산리 및 고아리 유적과, 합천 옥전 고분 등에서도 연꽃무늬 수막새가 확인된바 있다.
‘1000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는 신앙의 매개’가 되었다는 일연 스님의 찬시 또한 의미심장하다.
파사석탑은 가야 백성들은 물론 신라와 고려조를 이어오는 동안 나라의 안녕, 즉 남쪽으로 왜의 침범을 막는 믿음의 상징탑으로 추앙받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후 사찰과 탑을 마구 훼손하던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가면 파도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바둑판 모양의 석재?
물론 지금 남아있는 파사석탑의 양식이 가야, 즉 허황후나 질지왕 시대, 혹은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조성된 탑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최근 전지혜 부경대 강사가 12월 말 발간예정인 학술지 <진단학보> 제133호에 게재될 ‘김해 파사석탑의 원형에 대한 고찰’ 논문에서 “파사석탑은 불탑의 모습이 아닌 석재(돌) 그 자체로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지혜 강사는 특히 “현재 남아있는 석탑의 부재도 원형훼손은 많지만 그 두께는 거의 일정하다”면서 “그렇다면 실제로 평평하고 넓게 다듬어진 석재가 배에 실려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지혜 강사는 1280년대 <삼국유사>를 완성한 일연 스님의 13세기대 시각으로 바라본 파사석탑에 주목했다. 특히 “탑이 사면이 네모 반듯한 방형의 5층이며(塔方四面五層)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其彫鏤甚奇)”는 <삼국유사> ‘금관파사석탑조’의 기사에서 13세기 일연 스님이 목격한 탑의 형태를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면이 방형이라면 마치 바둑판 같은 형태이다. 일연 스님은 일반적인 탑의 형태(예컨대 석가탑 같은)가 아닌 바둑판 형태의 돌을 쌓은 탑을 보고 ‘기이한 4면의 5층탑’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하나 파사석탑의 부재 아래에 선명하게 조각한 공포(공包)의 형태는 14세기 조성된 경천사지 10층석탑을 연상시킨다. 경천사지 10층석탑과 파사석탑처럼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다포(多包) 양식의 탑은 대략 고려말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탑의 양식에 과문한 기자는 전지혜 강사에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 강사가 공부한 13세기 파사석탑의 원형이 어떤 식인지 한번 그려달라”고 했다. 공포니 출목이니 다포니 하는 어려운 건축용어 때문에 이해하기 역불급이었기 때문이다. 전지혜 강사는 탑의 그림을 그려주면서도 “현재의 상태로 파사석탑의 원형을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지금 그린 탑은 이기환 기자와 독자들을 위한 이해돕기용”이라고 누누히 강조했다.
■16살 공주의 채취가 묻은 탑
물론 이 순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파사석탑의 돌이 2000년 전 서역 야유타국의 공주(허황후 황옥)이 가져온 바로 그 탑이라는 100% 확증은 없다. 그리고 그 탑이 배의 침몰을 막아줄 평형석의 형태로 실었다가 훗날 신앙의 대상인 탑으로 조성된 것인지, 그렇다면 그 시대는 언제인지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 지역에서는 기원후 48년부터 일연스님의 시대인 13세기 후반까지 1200년 동안 전승된 뿌리깊은 이야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연 스님은 가야는 물론 신라와 고려조를 이어오는 동안 나라의 안녕과 개인의 화복을 비는 상징탑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을 집필했다. 그런 일연 스님의 노작을 두고 함부로 ‘가공된 이야기’니 ‘허무맹랑한 변설’이니 하는 말로 폄훼하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다.
2000년 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져온 파사석탑의 재질은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일연 스님의 말대로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돌이라 한다. 하늘이 점지해준 수로왕과의 혼인을 위해 이역만리 거센풍랑을 헤치고 김해 앞바다에 닿았을 16살 공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참고자료>
전지혜, ‘김해 파사석탑의 원형에 대한 고찰’, <진단학보> 133호, 진단학회, 2019
고려대산학협력단, ‘경남문화재자료 제227호 김해 파사석탑의 암석학적 특성분석 및 산지추정 분석 결과 보고서’, 국립중앙박물관, 2019
이거룡, ‘파사석탑 고찰-가락국과 아유타국의 해양문화교류 가능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4권,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8
황정일, ‘가야 불교 전래 관련 쟁점 검토’, <동아시아불교문화> 제25권,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5
이현태, ‘가야의 불교’, <가야 동아시아 교류와 네트워크의 중심지들>(가야본성, 칼과 현 특별전 학술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9
경향신문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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