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치유일까 상처일까…‘가상 재회’가 던진 먹먹한 질문
입력 2020-03-06 00:37:00
다큐 ‘너를 만났다’를 통해 본 VR 산업의 미래
마당에 쌓인 장작더미로 다가가자 그 뒤에 앉아 놀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엄마 보고 싶었는데…."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는 행복한 듯 웃었다. 생일 파티와 식사를 마친 아이는 침대에 누웠다. "엄마, 나 졸려".
8분간의 만남이 끝났다. 먹먹해진 가슴으로 헤드셋과 컨트롤러를 내려놓자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까지 몰입했던 잔디밭·식탁·침실 대신 컴퓨터와 모니터, 스크린 등이 펼쳐져 있다. 가상 재회를 가능케 했던 VR(가상 현실) 콘텐츠 제작업체 사무실이다.
코로나19가 전국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지난달 초 MBC에서 방송된 ‘너를 만났다’가 화제를 모았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인 VR을 이용해 3년 전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일곱 살짜리 나연이와 엄마 장지성씨가 만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방송 이후 유튜브 영상 조회가 1800만회(5일 현재)를 넘는 등 반응이 뜨겁다.
화제의 VR을 만든 서울 강남구 신사동 비브스튜디오스를 찾아가 영상을 직접 경험해봤다. 영화·게임 등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CG 전문업체다. 헤드셋을 쓰고 들어간 가상 현실은 실감도와 몰입도에서 제3자 입장에서 TV를 봤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실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CG 캐릭터였지만, 먼저 떠나 보낸 아이를 다시 만난 엄마의 심정이 느껴지면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관련 업계가 이 VR 콘텐츠를 주목하는 것은 ‘실감 영상’으로 통칭하는 VR·AR(증강현실)·MR(혼합현실) 산업의 새 가능성을 던져줬기 때문이다.
AI 등 첨단기술 동원된 가상 재회
비브스튜디오스의 김세규 대표는 "방송사의 제안이 들어왔을 때 ‘아, 이건 수익을 떠나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게임과 오락으로만 소비됐던 VR의 새 영역을 개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간과 비용의 제약에다 나연이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필요한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VR 제작 감독 이현석 PD는 "VR 속 캐릭터의 형태·움직임·인터랙션(감상자와 캐릭터의 상호 반응)이 자연스럽게 구현돼야 하는데, 아이를 찍어 둔 영상과 사진만을 활용해 작업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해결책은 실제 대역을 쓰는 것이었다. 비슷한 체형의 아이를 3D 스캔해 형태를 잡은 뒤 얼굴 사진 등을 참조해 CG 작업을 했다. 또 대역 배우로 하여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게 한 뒤 이를 바탕으로 CG를 만드는 ‘모션 캡처’ 기법을 활용했다.
또 하나의 관건이 목소리였다. 나연이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이 있긴 했지만, 분량도 적고 잡음이 끼어 있어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음성 합성을 해야 했다. 비슷한 음색의 아이들 5명이 녹음한 대사와 수십명의 성우 음성 DB(데이터베이스)에서 뽑아낸 ‘오디오 소스’를 활용해 상황에 맞는 목소리를 재현해 냈다.
작업에 든 시간은 8개월, 제작 예산은 5000만원 정도였다. 김세규 대표는 "시간과 예산의 제약 때문에 아주 만족할만한 수준의 결과물이라곤 할 수 없다"면서도 "VR과 AI가 친근하고 따뜻한 기술이란 걸 보여준 것을 큰 의의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20억원쯤 들이면 해상도와 실감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VR·AR 산업 돌파구 역할 기대
VR·AR 등 실감 영상 분야는 정부의 핵심 지원 사업이다. 과학기술정통부는 올해 실감 콘텐츠의 본격적 확산을 위한 디지털콘텐츠 산업 육성에 총 19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5세대 서비스를 시작한 이동통신사들도 VR과 AR을 대표적 서비스 콘텐츠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실감 영상 산업의 본격적 부상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장 큰 이유는 기기 착용의 불편함과 콘텐츠 부족이다. VR을 즐기기 위해서는 HMD(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라는 장비를 머리에 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오락과 게임에 치우친 콘텐츠도 생각만큼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CG 제작 능력은 한국이 수준급이지만, 기획 능력 등에서 선진국을 못 따라간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가상 재회’ VR이 실감 영상 산업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 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게임과 오락에 치우친 실감 영상 산업에 ‘휴먼 콘텐츠’가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영국 국영방송 BBC, 로이터, 싱가포르 방송사 등이 비브스튜디오스를 취재하는 등 이런 시도는 해외에서도 관심이 되고 있다.
가상 재회 VR에 ‘디지털 휴먼’이라는 의미를 붙인 김세규 대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자신한다. 김 대표는 "반려동물 복제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부유층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VR을 통해 고인들을 추모하고 만나고 싶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체에서 신입사원이나 일반인이 가상 현실을 통해 선대 창업자를 만나볼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추모관’도 사업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심리치료 전문가가 함께 참가해 치유 목적의 VR 콘텐츠 제작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불멸에 대한 거부감도
다큐멘터리를 본 시청자들은 가슴 뭉클했다는 응원이 많았지만, 남은 사람들이 받을 심리적 상처를 걱정하는 반응도 많았다. 이현석 PD는 "제작진도 그 점을 걱정하며 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이 PD에 따르면 나연이 엄마 장지성씨는 다행히 ‘강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다큐멘터리 의미에 동의하고, 자료 제공에도 적극 협조하는 등 ‘낯선 재회’에 대한 심리적 준비가 충분히 돼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 PD는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만남에 대한 기대가 슬픔을 이겨 내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방송 전 장씨는 나연이의 투병기와 추억 등을 올려온 자신의 블로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방송 후에는 "늘 꾸고 싶었던 꿈을 꾼 것 같았다"며 감격했었다. 그러나 방송 후 달린 일부 악플에 결국 블로그를 비공개로 돌리고 말았다.
악플은 그 자체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만, 디지털 불멸 혹은 이를 이용한 비즈니스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국 질문이 남는다. 떠난 자와의 재회가 과연 치유가 될지, 또 다른 상처가 될지.
■ VR, AR, MR, XR…차이를 아시나요「
다 같은 실감 영상 기술이지만, 개념이 조금씩 다르다. 감상하고 체험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다. VR(가상현실)은 현실과 100% 분리된 가상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HMD(Head Mount Display·사진 ①)라는 기기를 머리에 쓰고 바닷속 체험, 하늘을 나는 경험, 360도 공연 감상 등을 할 수 있다.
AR(증강현실)은 현실 세계 위에 가상의 이미지를 겹쳐 하나의 영상으로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 것이 VR과의 차이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스마트폰 게임 ‘포켓몬고’다. 화면에 비친 실제 길거리에서 포켓몬들이 나타난다.
가구를 직접 들여놓지 않고도 집안에 설치한 상태를 스마트폰으로 미리 보는 전자상거래 기술도 좋은 예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특수한 수트를 입으면 모든 정보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도 일종의 AR 기술이다. MS의 홀로렌즈(②), 매직리프의 리프원(③) 같은 기기가 AR 콘텐츠를 즐기기 위한 기기들이다.
혼합현실을 뜻하는 MR은 VR과 AR의 장점을 합친 기술이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정보를 결합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영화 ‘킹스맨’의 원탁회의 장면이 쉬운 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참석자들이 안경을 쓰고 동시 접속하면 같은 방에 모여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기술이다. 이런 VR·AR·MR은 결국 현실이든 가상이든 공간을 확장한다는 개념이다. 이 때문에 이런 기술을 통칭해 XR(확장 현실) 기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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