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발 폐플라스틱 대란…기업·소비자 2인3각 감축을
입력 2020-09-26 00:20:06
"얘들아 이번 추석에 안 와도 된다. 선물은 택배로 부쳐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재확산 우려가 큰 가운데 추석 분위기도 예년과 다르다. 정부에서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촉구하면서다. 그런데 뒷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이번 명절이 지나면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생하겠구나’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2020년은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생존을 위해 ‘비대면’ 생활방식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과 접촉하며 살아왔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사람들과 모여 앉아 밥을 먹었고, 혼자 먹더라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나와 같은 공간 안에서 식사를 했다. 혼술과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였다.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내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삶의 방식이었다.
소비자 필요보다 기업 이익 유지 수단
코로나19는 이런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어도 그의 동선을 믿지 못하면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 온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의 어두운 터널 안에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되도록 줄이고 나 아닌 누구와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생활방식을 찾아 헤매고 있다.
수퍼마켓이나 시장을 가기보다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횟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식당에 가기보다 배달음식을 시키고, 집 밖을 나갈 때 늘 마스크를 낀다.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디자인되어 있던 우리의 생활방식이 코로나19 때문에 이렇게 기본적인 접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바뀌자, 우리 모두는 혼란스러워졌다. 혼란 뒤에는 안전에 대한 끊임없는 우려, 내가 다음 확진자가 되지 않을까라는 공포감이 이어졌다. 기업들은 바로 지금을 기회로 삼아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더욱 늘릴 이유를 찾고 있다.
그린피스는 지난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형 유통사를 상대로 ‘플라스틱 제로’ 캠페인을 펼쳤다. 플라스틱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유통시키고, 한 번 쓰면 버리게 하는 사업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플라스틱 줄이기 노력은 탄력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문제점을 시민들이 지적하고 나서자, 아무 생각 없이 플라스틱을 써온 기업들이 마지못해 움직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닥쳐버린 팬데믹, 그리고 접촉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자 대형 커피 전문점들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매장에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사태는 플라스틱 없는 사업구조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들이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권장하는 시스템으로 얼마나 빨리 회귀하는지 보여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1907년 벨기에 출신 미국인 레오 베이크랜드는 현재 우리가 많이 사용하고 있는 형태의 플라스틱을 개발했다. 화석연료인 석유에서 플라스틱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한 것이다. 그의 발명에 힘입어 1929년 스티렌수지, 1930년 폴리에스터, 1933년 PVC(생수병에 많이 쓰이는 물질), 그리고 1935년 나일론까지 차례로 나왔다. 하얀색이거나 투명한 플라스틱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플라스틱 공장들이 대량생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트럭에서부터 레이더 단열에 이르기까지 전쟁물품에 쓰일 재료를 생산하면서부터이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플라스틱 공장들은 이전처럼 대량으로 플라스틱을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고 남아도는 플라스틱 때문에 난관에 부딪힌다. 그때부터 플라스틱 공장들은 어느 곳에 플라스틱을 팔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일반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인 그릇·물통·장난감 등을 모두 플라스틱으로 바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확산은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기업들이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제품들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지금도 기업들의 행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기후변화 해결을 위해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석유와 디젤을 사용하는 내연기관 자동차를 금지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수익은 더 이상 예전만큼 보장되지 않게 됐다. 근시안적으로 기업의 단기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는 정유화학 회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거대 정유회사들이 각국의 기후변화 정책으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플라스틱 생산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을 꼬집는 기사를 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화학·정유회사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이 기업들은 미국 정부가 케냐와 무역협상을 할 때 케냐 정부의 일회용 플라스틱 정책을 포기시키라고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2차 대전 기점으로 플라스틱 대량 생산
케냐는 2017년에 일회용 비닐봉투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발표했고 2019년에는 세계 여러 나라와 함께 플라스틱 쓰레기 수입 금지에 동의했다. 우리는 우리가 쓴 플라스틱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해 남의 나라에 버리고 있었고, 그 나라들이 이제는 쓰레기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우리는 2018년 중국이 플라스틱 쓰레기 수입 금지를 발표했을 때 ‘대란’이라고 불렸던 플라스틱 쓰레기 사태가 벌어진 것을 기억한다.
유통회사들 중 정유회사가 계열사로 묶여있는 기업은 어디인지, 계열사의 이익 때문에 불필요한 플라스틱 유통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객인 우리들이 꼼꼼히 지켜봐야 한다. 쓰레기 대란 때 겪었던 불편함처럼, 플라스틱의 무분별한 생산의 부작용은 결국 우리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린피스는 전 세계 주요 사무소들과 함께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플라스틱 사용을 부추기는지,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사업구조가 그들의 이익에 얼마나 반하는지를 보여주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진행한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일회용 플라스틱의 감축은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변화와 공적 리더십 발휘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대형마트, 일회용 플라스틱 50% 감축 등 변화 움직임「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2019년부터 이마트·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를 상대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을 공개하고 감축할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롯데마트는 그린피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2025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을 50%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롯데마트는 5년 안에 일회용 플라스틱을 순차적으로 줄이기 위해 자체 상표(PB) 상품의 친환경 패키지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비닐봉투 사용 제로 매장을 위해 단계별 감축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탈(脫)플라스틱은 기업 경영에서 필수 요소다. 그린피스는 세계적으로 제조사·대형마트 등을 상대로 플라스틱 포장재 감축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여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세제, 아이스크림, 바디케어 제품 등 생활용품 판매 업체 유니레버는 2025년까지 플라스틱 사용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페트병 세계 최다 생산 업체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는 플라스틱산업협회에서 탈퇴하고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는 대열에 합류했다. 영국 대형마트 세인즈베리는 2018년 "2025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 사용량 50%를 감축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수퍼마켓체인 자이언트이글도 "2025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전면 중단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 점유율 1위 업체인 이마트에서도 작지만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25일 이마트는 환경부와 협력해 일부 지점에 세제를 리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에코 리필 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에코 리필 스테이션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은 세제 용기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채워서 사용할 수 있다.
국내 대형마트의 변화는 반길 만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구체적인 감축 실천 계획을 수립하려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플라스틱 사용량을 우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 국내 대형마트는 자체적인 플라스틱 소비량을 파악하지 않고 있다.
눈에 띄게 감축하려면 플라스틱 사용량을 파악한 후 이를 대중에 공개하고, 실제 운영 과정에서 플라스틱 사용량을 체계적으로 감축하는 구체적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
이현숙 그린피스 동아시아 프로그램 디렉터
서울·베이징·홍콩·대만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다. 2017~201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그린피스 인터내셔널(본사)에서 석유 관련 선임 전략가로도 활동했다. 한국이 2050년 탄소순배출 제로와 재생가능에너지로 100% 전환 등 기후위기 분야에서도 세계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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