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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남북교류, 통일, 남북협력

FERRIMAN 2021. 2. 4. 18:32

[특별기고] ‘먼저 온 통일’ 홀대하면 ‘앞으로 올 통일’도 잡을 수 없다

입력 2021-02-04 00:25:00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 질서에 기초한 첫 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선거로 구성된 동독의회는 헌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배제하고 자본주의 경제 원칙을 채택하는  등 헌법 개정을 시작했다. 

 마침내 같은 해 10월 서독 기본법에 의한 편입의 방법으로 동·서독이 통일을 완성했다. 당시 세계는 수십 년 동안 공산체제에서 살아온 동독 주민들이 동독에 갑자기 나타난 서독 정당들의 정치적 진출을 받아들이고 서독 정당들의 ‘자매 정당’들이 선거에서 압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했다. 당시 동독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층이 대거 개혁 세력으로 돌아설 수 있었던 요인은 냉전 시대 서독으로 탈출해 서독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동독 출신들의 활약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서독에 있던 수많은 동독 출신들이 동독으로 돌아가 자유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을 주입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체제 변화의 기회가 생길 경우 북한 기득권층에 쉽게 다가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와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알리고 설득할 수 있는 적임자가 바로 고위급 탈북민들이다. 대한민국으로 온 약 3만 5000명의 탈북민 중에는 북한의 당·정·군은 물론 보위부와 보안·사법 계통, 심지어 형기를 마친 남파 간첩까지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앞으로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와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입각한 대한민국 시스템을 북한에 이식할 준비가 된 인재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다. 지금 한국에는 고위층 탈북민들에게 통일 시대를 고려해 어떤 교육을 제공하고 직업교육을 지원할지에 대한 정책이 전무하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나 독립을 맞을 사전 준비가 없었기에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의 비극이 초래됐다. 앞으로 북한에서 체제 전환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중국 등 주변국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이뤄나가려면 철저한 사전 준비가 있어야 한다. 

 최근 이탈리아 주재 북한 임시 대리대사와 쿠웨이트 주재 임시 대리대사 등이 탈북해 입국했지만,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다른 고위직 탈북자는 형편이 어려워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다고 대한민국에서도 무슨 특혜를 주자는 말은 아니다. 고위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조기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의 과거 경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직업 교육과 적합한 분야의 직업이 시급하다는 말이다. 

북한에서 온 고위층들이 한국에서 잘 정착해야 북한에 있는 엘리트층도 대한민국에 대해 더 동경하고 전향적인 자세를 갖고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역대 정부는 북한에서 고위층이 오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고위층이 오면 조용히 일할 수 있게 해주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단 한 명의 고위급 탈북민도 고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이토록 탈북민들을 방치하는 것은 고위급 탈북민들을 ‘남북 대화의 장애물’로 여기는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탈북민들을 일컬어 ‘먼저 온 통일’이라고 한다. ‘먼저 온 통일’을 방치하면 ‘앞으로 올 통일’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의 성공적인 정착은 단순히 개인과 그 가족의 행복을 실현하는 의미를 넘어 김정은 정권의 폭정에 신음하는 많은 북한 주민에게 큰 희망을 주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통일 준비를 위해서는 고위층 탈북민을 위한 맞춤형 정책이 절실이다. 

태영호 국민의힘 국회의원(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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