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예술원은 꼭 존재해야 하는가?
입력 2021-09-09 00:46:00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소설가 이기호씨가 어느 문예지에 발표한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형식은 소설이나, 실은 대한민국 예술원의 고질적 문제를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같은 작품이다. 그는 문화예술 예산의 삭감으로 지원사업에 응모했던 젊은 작가들이 줄줄이 탈락하는 상황에서 예술원만은 외려 예산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이 지적하는 예술원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조직의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거기 계신 어른들 대부분 대학교수 출신이잖아요? (...) 교수로 정년 퇴직해서 매달 300만원, 400만원 사학연금 받으시는 분들이 예술원 회원이 돼서 또 매달 180만원 더 받아 가시는 거예요.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을. 이게 좀 비겁한 거잖아요?" 이미 잘 사는 분들에게 무슨 지원이 필요하단 말인가.
■ 「 조직의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고 운영도 폐쇄적, 그들만의 리그 예술 위한다면 명예만 취하고 돈 내가며 후배들 창작 지원해야 」
둘째는 조직의 구성과 운영의 폐쇄성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그 선출 제도 때문이에요. 자기들이 스스로 예술원 신입 회원을 선출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자기들하고 안 친하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한마디로 자기들만의 리그라는 얘기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박경리 선생, 최인훈 선생도 회원이 아니라니, 거기 모인 분들은 얼마나 위대하신 분들일까?
예술원 예산 32억원 중 20억원 정도는 회원들에게 월 180만 원씩 나눠주는 수당으로 나간다. 나머지 10억 여원 중 4억원은 4개 분과에 1억원씩 나눠주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의 상금이란다. 그 상도 회원들끼리 나눠 받다가,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얼마 전에 외부인에게 주는 것으로 바뀌었단다. 하지만 수상자로 선정된 그 ‘외부인’도 결국은 회원들과 가까운 사람들. 대체 이런 조직이 왜 필요할까?
충남대 오길영 교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술과 국가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때로는 시대와 불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의 타고난 숙명"이다. 그런데 "국가가 지급해 주는 급여를 매달 따박따박 받는 ‘국가기관’에 속한 예술가가 그 국가의 행태를 뾰족하게 드러내는 작업에 힘을 쏟을 수 있을까?" 예술원이라는 제도 자체가 예술의 본질과 충돌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이런 인식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어느 예술원 회원이 박경리 선생을 찾아뵙고 회원이 되실 것을 권유했단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이 이를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그딴 곳 안 간다." 그들의 허위 의식이 역겨우셨던 모양이다. 국가에서 부여하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명예 따위는 사실 작가나 문학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술원이라는 제도에 대한 이 불신은 정당하다. 우리 예술원은 1950년대에 반공우익문인단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 모델이 된 것은 천황제 시절의 일본의 예술원이었다.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 아카데미’(예술원)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탄생했으나,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하에서 예술적 취향마저 국가에 복속시키는 기관으로 제도화한다. 이것이 서구 예술원들의 뿌리가 된다.
‘예술원 회원’이라는 것이 명예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19세기 중반 이후 예술사에서 ‘아카데미’라는 명칭은 사실 욕설로, 즉 ‘인습에 매인 관제예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현대예술 자체가 아카데미에 대한 저항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예술원’의 존재가치를 의심하는 시각은 이 ‘모더니즘’ 예술혼에서 나온다. 사정이 이러하거늘, 도대체 이 시대에 예술원이란 제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물론 그 기원이 절대왕정에 있다고 지금의 예술원이 관제단체인 것은 아니다. (이를 ‘발생론적 오류’라고 부른다.)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는 예술이라고 반드시 국가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서구의 예술원들은 시민혁명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원칙을 관철해 왔고, 그 결과 지금 시민의 감각기관으로서 예술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예술원을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교육, 전시, 창작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서구의 예술원들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민망한 일이다. 예산이라고 달랑 32억원. 그걸로 무슨 예술을 진흥한단 말인가. 사실 한국(과 아마도 일본)의 예술원은 일종의 ‘보훈단체’다. 사실상 문화적 ‘신분제’의 기관으로 운영되니,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가 날카로워지면서 그 존재 이유마저 의심받게 된 것이다.
예술원이 정말 예술을 위한 기관이 되려면, 회원들은 오직 ‘명예’만을 취하고, 국가로부터 돈을 받을 게 아니라 돈을 내가며 후배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단 예술원이 제 기능을 하는 것으로 확인되면 국가의 지원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나라에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예술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도 번듯한 예술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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