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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학, 대학의 본질, 위기의 대학, 품격, 교육,

FERRIMAN 2022. 6. 19. 13:17

Opinion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대학의 본질은 자유, 관료적 규제부터 혁파해야

중앙일보

입력 2022.06.06 00:32

 

위기의 대학, 살길은 무엇인가

 

위기와 불확실성.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때 빈번하게 사용하는 키워드다. 팬데믹 상황에서 정치 갈등, 경제 양극화, 사회 분열의 위기가 겹치고, 인구절벽과 기후변화, 국제관계 불안정도 심각하다.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암울한 전망이 퍼지는가 하면,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에 거는 장밋빛 기대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정부와 민간 영역 모두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중세 이후 여러 차례의 대변동과 맞물려 성쇠와 진화를 거듭해온 대학 또한 시대 전환의 도전에 직면해있다. 급변하는 외부 환경과 감소하는 진학 인구, 학습 방법의 변화, 대안 교육기관의 출현에 직면하여 독점적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은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진화할 것인가?

한국의 대학 경쟁력은 47위로 국가 경쟁력 23위보다 크게 낮아
대학 자율성 키우고 혁신 이루려면 정부·기업의 투자 확대 절실
대학 지원 예산 GDP의 0.6%에서 OECD 평균인 1.1%로 늘려야
사회 전체와 연결된 네트워크·플랫폼 기능에 대학의 미래 달려

대학의 양극화 현상 갈수록 커져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유수 대학들의 생존전략은 변화를 거부하고 상아탑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급격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과감한 혁신을 시도한 대학들이 교육과 연구의 주도권을 행사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유럽과 미국의 명문 대학들이 보여준 혁신의 노력이 현재 세계 대학 순위에 반영돼 있다. 그들은 지금도 앞장서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대학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현대의 대학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버드·MIT·예일·프린스턴대 등은 명품 전략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차별화된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해서 고등교육을 지배할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해있다. 애리조나주립대 등의 공립대학은 온라인·오프라인 통합 학습 모델을 통해 정원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충분한 학력 인증을 제공하지 못하는 영리 목적 대학들과 재정적으로 취약한 소규모 자유교양 대학들은 소멸하게 될 것이다.

개인별 맞춤형 교육과 개방적 학습 플랫폼으로서의 대학,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유연성을 높이는 뉴노멀의 대학, 허브 역할의 대학 캠퍼스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평생교육 시스템으로서의 대학, 그리고 대학 간 협업과 경쟁의 기반을 분야별로 재구축하는 방안 등 대학 혁신의 많은 제안이 논의되고 있다.

경제 성장과 문화 발전의 기반인 지식 자본 축적과 혁신을 주도하는 ‘창조적 대학’, 경계를 넘나드는 수평적 상호작용을 활성화하는 ‘네트워크 대학’, 변화와 위기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민첩한 대학’ 등 학자들이 제안하는 미래 대학의 모델은 다양하다. 기존 대학이 사회와 연결되는 네트워크와 플랫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 대학의 융성을 뒷받침했던 표준화·분업화·전문화의 틀을 넘어 다양성과 연결성을 살리는 방향의 혁신이 필요하다.

개인 맞춤형 교육, 학제 융합 필요

대학 혁신은 융합 교육과 연구, 맞춤형 온라인 교육 플랫폼, 유연하고 분권화된 거버넌스, 재정 확충 등 다양한 요구를 해결해야 가능하다. 대학은 연구개발, 실용교육, 교양교육 등 많은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 교육 혁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다. 교과 내용 개편과 교육 방식의 다양화, 온라인 교육 플랫폼과 기숙대학(Residential College)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문해력,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력, 유연하고 탄력적인 문제 해결 능력, 소통과 협업 능력 등을 함양하는 혁신적 교육의 근간이 마련돼야 한다.

온라인 학습관리시스템 혹은 온라인 강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혼합형 학습(Blended Learning), 나아가 첨단 IT 인프라를 기반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 참여자의 동시적 소통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하이브리드 교육 모델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학습 효과와 교육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또 하이플렉스(HyFlex) 교육을 통해 학생은 면대면, 온라인 실시간, 온라인 비실시간의 세 가지 수업 방식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인공지능 기반 교육’ 실험은 대화 기반 인공지능 개발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개인별 맞춤형 학습 환경을 구축할 것이다. 앞으로 대학의 교육 경쟁력 평가 기준은 개인화한 맞춤형 학습 방법 제공, 측정과 자료 분석을 통한 적응형 학습 시스템 개발, 세계적 교육기술 기업과의 협력이 될 것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 대학은 첨단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주도하는 연구기관으로서의 위상도 차지한다. 융합 연구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대학의 연구조직은 고정된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연구조직은 학과와 단과대학의 장벽을 넘어 포괄적이고 유연한 네트워크와 플랫폼의 형태로 구성돼야 하며, 연구 주제와 방법도 파격적이어야 한다. 기존의 분절적인 연구조직을 통합해서 새롭고 기초적인 연구 질문을 탐구하는 인적·제도적 기반을 조성하는 것도 대학 혁신의 중요 과제다. 막대한 규모의 정부 출연 연구개발 예산에도 괄목할 만한 연구 업적이 축적되지 않는 우리 현실에 대한 근본적 수술이 필요하다.

폐쇄적 학사·교과운영 개편해야

융합과 협업은 ‘관료제형 대학’의 획일성과 경직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사업성 예산을 위로부터 부과하고 관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불신에 뿌리를 둔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규제의 관행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유연하게 교육과 연구의 활력을 살리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대학의 이념은 자유다. 대학이 자유의 특권을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는 기존 지식과 관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대학 운영은 교육과 연구의 필요를 반영하는 ‘상식’에 근거해야 한다. 신뢰와 합의를 무시하고, 소수의 일탈을 막기 위해 전체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면, 학문공동체로서의 대학은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다양성과 연결의 혁신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폐쇄적 학사 구조와 틀에 박힌 교과를 개편하고, 학생·교수의 소속과 평가체계도 혁신해야 한다. 그리고 혁신에 유리한 탄력적이고 분권화된 거버넌스를 구축하기 위해 권한과 책임을 교육과 연구 권역, 자율 단위에 부여해야 한다. 분야별 교육과 연구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분권화된 거버넌스는 재정과 인사 권한 위임, 자율적 책임 행정 구현, 현장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행정 책임자 양성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

정부·대학·기업 연계 체제 구축

대학의 공공성 강화와 체질 개선을 통한 경쟁력 확보는 핵심적 국가 의제 중 하나다. 그리고 안정적인 대학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정부의 공적 투자, 등록금 현실화, 민간 기부 활성화, 산학 협력과 벤처 창업 지원 확대 등 다양한 제도적 지원과 보완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고등교육 재정 규모를 현재 GDP의 0.6%에서 적어도 OECD 평균 수준인 1.1%로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안정된 고등교육 재정 지원을 위한 법적 기반으로서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 제정도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실행해야 한다.

정부는 국민경제 혁신과 대학 재정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체계적인 산학 협력에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조직적인 연계 체제 구축, 기획·관리 기능 강화, 민간 자금 유치를 통한 재정 확충, 연구경영체제 정비, 지식재산 활용·관리, 기업과의 인적 교류 촉진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산학 협력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술·경영 지식, 기업 활동 경험을 겸비한 ‘산학 협력 코디네이터’를 양성·활용해서 대학과 기업을 한층 더 원활하게 연결해야 한다. 또한 산학 협력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수와 학생이 동참하는 문제 해결 지향형 교육·연구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대학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고등교육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인이 되면서 세계 각국은 심혈을 기울여 대학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에 미치지 못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발표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23위에 올랐지만 대학 교육 경쟁력은 47위에 그쳤다. 대학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의 자율성 확보, 대학 자신의 절박한 혁신 노력, 정부 지원과 기업 투자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더는 주저하거나 미룰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유홍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