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용 디스플레이·사생활 보호·단열 등 각종 생활용품의 재료로 활용
나노기술을 통해 시력 시스템을 제공하거나 도시의 가상여행을 경험할 수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유리를 통해 줄거리를 이어간다.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유리는 손만 대면 고화질 액정 모니터의 선명한 화면을 보여준다. 망막 스캐너로 시시각각 신분이 확인되는 도심에서 유리로 된 대형 광고판은 지나가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맞춤한 상품을 보여주고 ‘호객 행위’까지 한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이뤄지는 유리의 화려한 변신은 놀랍기 그지없다. 유리가 첨단과학의 세례를 받아 현명한 물질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날씨에 따라 색상과 기능을 바꾸고, 자동 온도조절 기능으로 열을 차단하기도 한다. 나노기술은 강력한 내구성을 지닌 금속유리를 만들고 인공뼈를 만드는 생체유리도 개발하고 있다.
코팅 유리는 최대 50%의 열 줄여
최근 유리는 전자적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예컨대 집적회로(IC) 태그 구실을 하는 캡슐을 상감 형식으로 박아넣은 유리가 개발되기도 했다. 이 기술은 IC 태그 응용 분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시제품에서 IC 태그는 주로 종이 사이에 끼워졌다. 유리에 내장된 태그는 고온과 유독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분야에서 널리 활용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유리는 디스플레이에도 사용될 수 있다. 자동차의 바람막이 유리에 내장된 태그들은 자동화된 통행료 징수 창구에서 차량 식별 장치로 이용되며, 가전제품에서는 읽기 기능이 있는 휴대용 디스플레이에 응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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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단 유리는 각종 전자기기에 필수적으로 쓰인다. 한 전자회사의 PDP 생산라인 클린룸에서 상하판 유리를 조립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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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똑똑한 유리는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유리섬유는 화학적 내구성에 절전 기능까지 지녀 각종 생활용품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 할로겐화은을 함유한 포토크로민 유리는 선글라스 렌즈나 자동차 유리에 널리 쓰인다. 햇빛의 자외선이 유리에 닿으면 할로겐화은 분자들이 들떠서 가시광선을 흡수한다. 이로 인해 렌즈의 경우 눈부심이 차단되면서 어두워진다. 실내처럼 자외선이 없으면 렌즈가 밝아진다. 유리 안에 0.5기압의 공기를 집어넣은 유리블록은 단열과 투광 효과가 좋아 건축자재로 쓰인다. 유리의 보조 성분인 알칼리 물질의 함량을 높여 전류를 흐르도록 하는 전도성 유리는 전류 저장 장치로 쓰인다.
놀랍게도 에너지 문제의 해결책을 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유리가 기후에 따라 빛과 열을 선택적으로 흡수하고 차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 겨울에는 탁월한 보온효과를 내도록 할 수 있다. 예컨대 유리에 바나듐 산화물로 만든 박막을 코팅하면, 추운 날에는 열크롬 코팅이 햇빛을 전부 통과시키고 더울 때는 필름이 필터로 작동해 열을 발생시키는 자외선을 차단한다. 이같은 코팅 유리는 최대 50%의 열을 줄일 수 있다. 태양열이 임계온도를 넘은 상황에서 유리의 색깔을 바꿔가면서 냉방비를 절약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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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에서 가장 가벼운 고체로 우주선의 방열판 제작에 쓰일 '언 연기'에도 유리의 주요 성분이 포함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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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유리로 인한 사생활 노출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똑똑한 유리가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면서 덤으로 사생활 보호까지 챙겨주기 때문이다. 액정 창문은 전기를 끄면 젖빛으로 보인다. 이때 투명막 속에 들어 있는 액정들은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광선을 모든 방향으로 산란시키는 까닭에 사람의 눈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영상에 초점을 맞추기 어렵다. 그런데 전기를 켜면 전기장이 생기면서 액정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다. 이때 가시광선이 평행하게 통과되면서 유리가 투명해진다. 이런 유리는 커튼이나 블라인드 없이도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지만 입사광을 산란시키기에 바깥 경치를 바라볼 수는 없다.
이렇듯 유리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유리의 결정화다. 본래 유리는 비결정 물질로 일정한 구조가 없지만 열처리나 레이저를 이용해 유리 내부에 분자 레벨의 결정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결정화 유리는 빛의 파장이나 굴절률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어서 광섬유보다 전달 속도를 향상시키고 적외선을 가시광의 파장으로 변화시켜 태양전지의 발전 효율을 높일 수도 있다. 결정화 유리는 의료 분야에서 놀라운 가능성을 예고한다. 뼈에 포함돼 있는 아파타이트를 닮은 결정을 포함하고 있기에 인공뼈와 인공치아 등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유리는 나노기술을 통해 첨단 기능을 장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연구자들은 아주 작은 고성능 실리콘 나노 와이어들을 유리와 플라스틱에 붙여 박막으로 만들었다. 이 기술은 싸고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차세대 전자제품을 개발하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예컨대 시력을 상실한 사람에게 시력 시스템을 제공하는 디스플레이와 미니어처 컴퓨터가 장착된 콘택트 렌즈 등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유리를 통해 새로운 도시의 가상여행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미 등장한 ‘유비쿼터스 아파트’에 내장된 유리 거울은 모델이 포즈만 바꾸면 입고 있는 옷이 자유자재로 변하면서 최적의 옷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입자물리학에서 절대적인 영향력
현대 물리학의 꽃이라 불리는 입자물리학에서 유리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전자를 가속해 얻은 X선으로 물질의 구조를 분석하는 광가속기의 유도관이 유리를 이용한 고성능 거울로 이뤄졌다. 여기에서 유도관은 가속기에서 나온 X선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목표 지점에 모이도록 한다. X선을 조절하는 만큼 초고정밀 기술이 쓰이게 마련이다. 냉중성자를 반사시키려면 니켈과 티타늄으로 코팅된 특수 거울을 사용해야 한다. 한 번의 코팅 두께를 0.1nm 정도로 제어해가면서 갈수록 두께를 늘리는 방식으로 200층 이상까지 코팅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밀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거울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신기술을 개발하는 데 활용된다.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유리의 진화는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개발된 첨단 유리들은 비싼 가격에도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사생활 보호 유리만 해도 표준 경화 유리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이런 유리에도 인류가 최초로 유리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크게 변하지 않은 화학적 방법론이 적용된다. 일반적인 창문 유리와 현미경이나 강화 유리 등도 동일한 물질 성분을 따른다. 석회와 소다 대신 산화납이나 산화붕소·나노입자 등의 재료를 사용해 미세하게 조절하면서 놀라운 기능을 발휘하도록 할 뿐이다. 앞으로 어떤 물질을 통해 유리의 카멜레온 변신을 이뤄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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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끈적끈적한 액체
[숨은 1mm의 과학]
인간의 발명 이전에 자연에 존재했던 유리,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애당초 유리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게 아니다. 인간이 유리를 발명하기 이전에 자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유리가 널려 있었다. 인류의 손에 ‘발명’되기 전에 자연의 조화로 창조된 유리를 뒷날 눈으로 ‘발견’한 셈이다. 실제로 유리는 화산활동 시기부터 모래와 돌 등이 녹아 흑요석, 진주암 같은 천연 유리로 존재했다. 번개가 모랫더미를 칠 때나 화산의 뜨거운 용암이 쏟아져나올 때 녹은 모래나 바위가 식으면서 자연 상태의 유리가 만들어진다.
만일 지구상에 존재하는 탈 수 있는 모든 것은 재가 되어 없어지고 바닷물의 수분도 증발한다 해도 유리는 남는다. 불에 탄 바위와 흙이 녹으면서 나트륨 등과 결합해 유리 형태로 남는 것이다. 화산지대에 사는 새들은 유리(글라스울)를 둥지의 재료로 쓰고 있으며, 아메리카나 아시아 문명에선 천연 유리 조각들을 장식 목적뿐만 아니라 창의 촉이나 절단 도구 등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천연 유리는 각종 금속산화물을 함유하고 있기에 일상적인 재료나 도구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하다.
유리는 인간의 손을 거치면서 쓸모 있는 도구로 거듭났다. 모래에서 얻는 화합물인 실리카는 가시광선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제품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성질을 지녀 유리를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물질로 여겨진다. 광섬유 케이블에 쓰이는 유리는 순수한 실리카만으로 만들어지는데 높은 투명도가 광신호들의 전달을 빠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실리카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 유리도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유리는 모든 것이 재료가 되며, 모든 것의 재료가 되는 셈이다.
유리는 매우 단단해 보인다. 그런데 유리는 물질의 특성상 고체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고체지만 분자 구조상 액체에 가깝다. 유리가 빛을 통과시키는 이유도 분자 구조가 서로 느슨하게 결합된 때문이다. 물처럼 분자 구조가 느슨한 상태에서는 빛을 통과시키지만 고체처럼 분자 구조가 단단히 결합된 경우에는 빛을 반사하거나 흡수한다. 유리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중간 상태의 물질로서 점성이 극한적으로 높은 끈적끈적한 액체라 할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유리창은 아래쪽이 위쪽보다 두껍다. 오랜 세월 동안 유리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린 까닭이다. 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열을 가한 유리 그릇을 깨뜨리면 된다. 다른 고체와 달리 유리는 열을 가한 뒤에 물에 넣으면 깨지는데, 이는 열에 의해 분자 결합이 풀리면서 팽창한 유리가 온도를 갑자기 낮추면 뜨거워지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의 물질적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제조법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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