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우리나라 과학史 이야기 박성래 교수, 과학문화융합포럼 강연 2008년 11월 17일(월)
"과학과 비과학의 융합이 가장 필요한 나라가 우리 나라이다. 우리 지식층이 갖고 있는 지나친 선비의식, 정치과잉 의식도 극복의 대상이지만 지나친 중인 의식도 타파해야 한다."
박 교수는 첫번째로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을 평가하며 세종의 과학적 업적은 기본적으로 통치권 확립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현재 많은 이들이 세종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그 후의 지도층이 무능력해서 과학발전이 시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의 과학은 통치권이 불안정한 세종이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말했다. 세종 이후의 과학발전의 몰락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자리잡은 조선의 국내상황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천문학, 의약학, 화약무기, 인쇄기술, 농업 등 많은 분야에 있어 발전을 이룩한 세종의 시대가 그 시대적 한계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강연은 세계의 과학사로 넘어갔다. 박 교수는 "세종으로부터 1세기 후에 서양에서는 전통적 우주관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고, 그것이 결국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이것이 서양 과학과 기술이 세계를 제패하는 기본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은 근대화의 늦깍이" 이어진 강의는 두 번째 내용으로 넘어가 박 교수는 한국의 과학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일본이 계속적으로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동안 한국이 배출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것. 박 교수는 "일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미 선진과학기술국가로 도약해 있었고, 우리는 1960년대 후반에서야 그런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형편이다"고 말했다. 이어 박 교수는 서양 선교사의 진출 시점, 서양 언어의 보급 정도가 그 격차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중국에는 1500년대 초에 이미 서양 선교사와 상인들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일본에는 1543년 처음으로 포르투갈 선박이 표류해오더니 그 후 서양인들의 출입이 점점 잦아졌다. 하지만 조선에는 서양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것이 1835년 쯤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1862년을 기준으로 서양 언어를 구하할 수 있는 사람이 일본 500명, 중국 11명, 조선은 0명이었다. 이런 것들이 현재 과학 수준 차이의 원인이다." 유교적 전통과 근대 과학
박 교수는 또한 "천문학자, 과학자, 수학자, 의사, 통역 등 오늘날의 전문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중인에 속해있었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도 부유했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배제돼 있었고, 그런 현상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김청한 기자 | chkim@kofac.or.kr 저작권자 2008.11.17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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