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KOSFT] 화학계의 대부 '김시중(金始中)'전 과기부 장관

FERRIMAN 2008. 12. 3. 20:53

 
화학계의 대부'김시중(金始中)'
등록일 : 2008년 12월 02일(화) 13시 18분
http://online.kofst.or.kr/Board/?acts=BoardPrint&bbid=1028&nums=5143
 

국정감사를 끝내고 예산안 심의로 공무원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국회 본관건물, 그 3층에 있는 의원식당 별실에선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도, 국회의원과 과학기술계 인사 50여명이 참석한 ‘창의적인 인재육성 방안’에 대한 열띤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화학계의 대부인 계정(溪丁) 김시중(金始中)박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과학기술포럼과 서상기 국회의원이 대표인 국회 디지털포럼이 공동으로 개최한 월례토론회였다.
지난 10월 31일의 일이다.

▷ 2000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소에서
12월에 창원에서 개최될 ‘국제 중등 과학올림피드’ 후원회장으로 추대되어 그 소임을 다 하기 위해서 삼성, 현대그룹 등 대기업체의 문턱이 달토록 드나들며 수억원의 후원금을 모았고, 2010년 중등 국제올림피아드의 개최를 확정짓고 우리나라 대표단의 참가를 위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멀리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를 방문해 그 나라 과학장관을 만나서 개최를 확정지은 후 귀국하고, 청와대서 열린 대통령 초청 과학기술계 원로 오찬에 참석하고, 국회 교육과학분과위원장이 초청한 초찬 모임에 나가는 등 노익장을 과시 하느라고 지난 10월 한 달 내내 인터뷰 할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김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 마감 시간에 쫒긴 필자가 찾아 간 곳이 국회 본관였다.

다행스럽게도 김 박사의 그날 오후 일정은 비워져 있었다.


부산 피난시절, 천막 교실 흙바닥에 앉아서 강의 들어


Q. 과학기술계 원로들을 찾아뵙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취재하여 독자에게 전하고, 또한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인터뷰입니다.

A. 고맙구먼. 내게도 들을 얘기가 있어요?


Q. 1950년 6.25사변 때,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에 입학해 고려대 명예교수로 퇴임하기까지 50년여를, 그리고 지금도 과학이라는 외길만 걸어가고 계신데요.

A. 요즘 젊은이들이 과학을 기피한다는데, 그 건 안이한 삶을 살고 싶어 하거나, 미래에 대한 꿈이 가냘프고 나약해서 도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중학교 6학년 때 화학 선생님이 ‘석유화학공업이 나라살림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석유화학 전문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서울 공대 화공과로 가려고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전국 중학교 1등 졸업생은 모두 서울대 문리대로 진학한다. 따라서 학교 명예 때문에 공대 원서는 써 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학에 도전하게 되었지요.

Q. 문리대 시절, 스승님들이랑 지내신 얘기나 당시 화학계 학맥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 김시중 박사(앞줄 오른쪽)가 1954년 중앙연
구소 분석화학 실험실 앞에서 최규원 교수, 변
종화, 김길종, 권필현, 전무식, 이계한 등과 함
께 찍은 사진.
A. 부산 동대신동 천막교실의 흙바닥에 앉아 강의 들었지요.
그래도 물리화학, 분석화학, 유기화학등 강의는 철두철미 했어요. 김태봉 교수는 ‘Organic Chemistry(코난트저)’ 한권을, 장세헌 교수는 ‘Element of Physical Chemistry(글라스톤저)’ 전권을 열강 하셨어요. 최규원 교수님은 분석화학을 담당하셨죠.

장세헌 교수님은 내 석사과정 지도교수이셨는데, 원리원칙과 교육철학이 뚜렷하셨지요. 참고도서도 없는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숙제를 많이 내주시면서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이셨지.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하셔서 제자인 내가 찾아뵙고 바둑도 두곤 하지요.

김태봉 교수님은 작고 하셨지만, 강의나 학생지도에 에누리 없이 철저하셔서 존경 받으셨던 선생님이셨고, 최규원 교수님도 아쉽게도 일찍 작고 하셨는데, 해박한 지식으로 항상 열강을 해 주셨어요.

부산 피난시절이라 실험실도 없었는데, 최 교수님께서 부산 범일동에 있었던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의 실험실을 빌려서 직원들이 퇴근한 밤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이 분석화학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하셨어요. 선생님의 정성에 감복한 학생들은 실험하느라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지요.

4학년 때 서울 동숭동 교사로 수복해 왔지요. 그때는 김순경 교수님의 물리화학 특강과 양자역학 강의가 인상적이었어요. 수년전 미국에서 작고하셔서 찾아뵈올 수도 없지만….
그리고 이종진 교수님의 영어원서 생화학 특강은 그 당시 압권 이었어요. 이 분도 작고하셨어요. 학우들로는 먼저 간 변종화, 전무식, 권필현이 있었고, 김길종, 이계한, 송승헌 등은 가끔 만나서 회포를 풀곤 하지요.

Q. 1955년에 고려대학 화학과 조교로 부임하셨던데~

A. 그 해 3월에 갔지요. 조교사령장에 월봉 1만2천환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때 하숙비가 1만환이었으니 생활이 어땠겠어요. 시간제 과외교사를 해서 용돈도 벌어야 했고 일반화학 강의와 실험에 쫒기면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또 가르쳤죠.  

학생들에겐 시험을 자주 치르고, 그 성적을 벽보로 붙였더니 처음엔 불평 하더니만, 나중엔 더 열심히 하더라고요. 당시 재직교수는 5명이었는데, 박기채, 국순웅 교수님은 몇 달 후 유학 가셨고, 김석배 교수는 건강상 사임했고, 3년 후엔 김태린교수 마저도 유학을 떠나서 한만운 교수님과 둘이서 학과를 끌어가야만 했어요.

그런데도, 학교당국은 3년 만에 전임교수로 임명하겠다던 약속을 져 버리고 5년을 끌더니 바로 조교수로 임명해주더군요.

40여년 간 대한화학회 이끌어 ‘국제적 학술단체’ 반석에 올려

Q.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설립된 대한화학회는 꾸준히 발전하여 60년대는 회원이 600여명 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71년에 총무간사를 맡으셨고 93년에 28대 회장이 되셨던데요.

A. 1971년에 마경석 간사장이 나를 총무로, 김광모 박사를 재무, 문탁진, 정구순 박사를 편집간사로 위촉해서 일을 시작했지요.

그 해에 지금 안암동에 있는 화학회관이 준공되어 입주했는데 이 회관은 안동혁 박사님이 수상하신 상금을 희사하셔서 설립이 추진됐지요.

쌍용양회 남기동 선생이 시멘트를, 한국유리공업 변일균 선생이 판유리를, 그리고 회원들이 기부금을 모아서 건축했어요. 나머지 건설비는 완공 후, 건물 임대입주금을 받아서 해결했고요.
그 해에 KIST에서 대한화학회 창립 25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국제 학술대회는 역사상 처음이었어요. 학술대회에는 외국 학자가 40명이나 참석했고, 석유화학공업의 육성, 국가발전과 화학의 역할이라는 2개 심포지엄에서 연구논문이 74편이나 발표되는 성황을 이뤘지요.

경회루에서 연회까지 열었으니까 그 당시로는 대단한 학술행사였어요. 당시 회원 수는 1천300여명이나 되었고. 75년부터는 ‘우리만의 화학술어 제정’에 심혈을 기울였지요.

83년에 간사장을 맡았는데 그 때는 진정일, 이대운, 김세권, 윤창주, 이조웅 박사들이 간사를 맡아서 활약했어요. 산학협동위원회를 신설하여 이서봉 박사가 활성화했고요.

87년에 롯데호텔에서 개최한 제2회 아시아 화학학술회의는 최상업 교수님이 조직위원장을, 신국조, 소현수 교수가 간사를, 심상철, 채영복, 김장환 박사가 분과위원장을 맡아 잘 치러냈지요.

그 당시 민주화 요구로 서울이 격렬한 시위장이 된 것처럼 외국에 알려져서 참가를 약속했던 몇몇 해외석학들이 참가를 포기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Q. 27년 전인 91년에 우리나라와 수교도 안한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연변에서 열렸던 한민족 과학기술자학술대회는 대한화학회가 만든 걸작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A. 학회는 89년부터 중공 연변대 화학과 강귀길 교수와 긴밀히 연락하여 한국, 북한, 중공의 우리 민족의 과학자들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학술회의를 극비리에 추진했어요.

그 결과, 91년 8월에 중공 연변 백산호텔에서 중공 조선족과학가협회, 연변조선족 자치주 과학기술협회, 조선과학기술자연맹, 한국과총이 공동주최한 학술대회가 성사됐고요.

이 대회에는 서울에서 100여명, 북한에서 45명, 중공에서 400여명, 재미· 재일 10여 명 등 모두 500여명이 참석했으며, 학술 그 자체도 중요 했지만, 수많은 한민족 과학자들이 분단이후 40년여 만에 처음 만났다는데 더 큰 의미가 부여되어 국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어요.

  ▷1991년 중국 연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김시중 박사가 연변대학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Q. 어떻게 중공 땅에 들어갔나요?

A. 그 당시는 비밀이었지만, 강 교수가 중공 고위직에 뇌물주고 성사시킨 겁니다. 우리 참가자들은 중국비자도 못 받았고, 비자 대신에 여권을 홍콩공항의 중공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맡겨 놓아야 했어요. 홍콩에서 중공관리가 인원수만 확인하고 중공 민항기를 태웠어요.

일종의 단체관광객으로 위장한 겁니다. 베이징에서 1박한 후 심양을 거쳐서 연변에 갔어요. 베이징에선 중공관리가 ‘북한의 납치나 방해공작이 우려되니까, 외출을 삼가하고 호텔 안에서도 몇이서 짝지어 다니라’고 했으니까, 엄청난 모험을 한 거예요.

Q. 북한측의 방해공작이나 수상한 일도 생겼을 법 한데요.

A. 연변 백산호텔에 도착해서, 우리 참가자들 중에 기자가 20여명 포함된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북한측 공작원들의 농간으로, 호텔측에 기자들의 숙소 배정을 못하게 해서 기자들이 몇 시간을 로비에서 기다리는 해프닝도 있었지요.

북한측 과학자들이 한국 과학자들과 함께 체류하는 호텔에 한국기자들이 투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다행히 기자들에겐 이웃에 있는 인민호텔을 내줘서 그곳에 체류했어요. 북한 공작원들의 감시가 엄청 심해서 주변 취재도 못했다고 합니다.

연변 대 공연장에서 열린 개막식 때는 북한공작원들이 우리 TV촬영기자들이 북한과학자들의 취재를 못하도록 카메라를 일시 압류하는 등 방해가 심했지요.

그래서 TV기자들은 우리 과학자들이 소지했던 8mm 비디오를 빌려서 현장을 녹화취재 해야만 했어요. 일행중엔 우리 안기부와 정보과 형사가 과학자로 위장해 있었는데 초주검이 되었더군요. 그들이 무슨 임무를 띠고 왔는지는 몰랐어요.

2개 공산국가의 한민족 과학자들과 한 테이블서 한국말로 대화

Q. 그 행사에서 북한과학자들은 만나보셨나요? 그들은 어떻게 지낸다고 했나요?

A. 도착하던 날은 얼굴도 못 봤어요. 그들은 출입이 통제된 한 개 층 안에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지요. 개막식에선 서로 목례만 했고, 학술행사장에서도 악수만 나눈 후, 감시공작원 눈치 보느라고 학술관련 이외의 다른 말에는 대답도 않더군요.

북한측은 저녁에 열리는 환영 만찬장도 북한 과학자 좌석을 별도로 배치해 놓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과학자들이 먼저 입장해서 모든 원탁테이블을 차지하고 분산해서 앉도록 선수를 쳤어요.
눈치 빠른 조선족 과학자들도 이일에 합세하더군요.

그래서 ‘북한과학자들이 퇴장 해버리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했는데 인솔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우리 사이에 섞여 앉게 하더군요.

그래서 분단 40년여 만에 ‘2개 공산국가의 한 민족 과학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서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Q.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텐데요.

A 많았어요. 다 쓸 수는 없을테니까 몇 가지만 전할게요. 만찬장에서 일본제국대학 화학과 동기생인 서울대 장세헌 교수와 고려대 박기채 교수가 동기생인 북한의 김성희, 김형락을 알아 본 겁니다. 두 분은 조선화학공업대학 교수라고 하더군요.

또 사회를 본 이우영 박사가 먼저 노래 한곡을 선창한 후, 중국과 북한 학자들도 노래를 시켰는데 중공이나 북한 과학자 모두가 서울에서 부르는 가곡들만 부르더라고요. 그러니 모두가 합창을 할 수 밖에 없었죠. 밤늦도록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됐어요.

Q. 또 다른 얘기는 없나요?

A. 학술행사가 끝나고 하루 일정으로 백두산에 올랐어요. 북한 과학자 45명도 함께 동행 했는데 모두가 처음 와 본다면서 즐거워했죠. 파랗게 맑은 하늘 아래 짙푸르게 펼쳐진 천지를 내려다보면서 다함께 ‘선창을 뺀 만세삼창’을 불렀어요.

하산 길엔 토속주를 사서 북한 과학자들과 나눠 마시며 덕담도 나눴지요. 북한과학자들이 불쌍해 보이더군요. 등산복이 없으니깐 트레이닝복을 똑같이 입혔더라고요. 한여름이라지만 백두산 정상은 엄청 추웠거든요. 하나 더 할까요?

북한 과학자 인솔 책임자는 조선과학기술자연맹 부회장인 이상균 인데, 인사를 나눈 후에 남북화학용어통일안을 만들기로 합의해 놓고 연락이 없어요. 지난번 평양 갔을 때도 시도해 봤고 여러 경로를 통해 전언해도 답장이 없어요. 그 행사 후에 숙청이라도 당했는지 궁금합니다.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기술은 확보되어야”

Q.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때 입각하셨는데, 이젠 장관시절 비화 좀 들려주세요.

A. 방폐장 미스터리나 들려줄까요?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 처분에 관한 얘기인데, 94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안면도 사태, 경남 양산 소요, 경북 울진 시위 등 사회문제를 야기하며 7년여를 끌어오던 방폐장 부지를 서해 굴업도로 결정하여 발표했어요.

재임 2년여 동안 엄청난 열정을 쏟았고,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어요. 섬에 처분장을 짓고 인접육지에 연구시설을 만든다는 분리개념이었어요. 이 결정에는 범부처적 사업추진위원회와 원자력위원회서 의결도 했고 대통령께 사전보고도 올렸어요.

그런데 발표 이틀 후에 해임 됐어요. 이듬해 여름엔 그 섬이 지진활성단층 이라면서 부지공고도 백지화 했어요. 나는 내가 왜 입각 했는지도 모르지만, 왜 해임됐는지 지금까지도 몰라요.

Q. 당시, 이른바 ‘비핵화 선언 거부 파문’으로 ‘소신 있는 장관’이라고 회자되셨지요?

A. 2~3년 후면, 원자로에서 태우고 배출된 ‘사용후 핵연료’의 원자로 내 저장고가 포화상태가 돼서 문제가 돼요. 그런데 핵연료를 수입해야하는 우리 입장에선 이 사용후 핵연료는 ‘꼭 재활용돼야 하는 폐기물’이예요.

처분장을 건설해서 저장하는 건 후손들에게 재활용 기회를 넘겨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는 사용후 핵연료의 저장고 건설과 나아가 재처리 공정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확립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저장고 건설계획 자체가 없는 우리 입장에선 빠른 시일내에 재처리해서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올 해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하는데 미국을 설득해서 재처리 기술을 확보해야 합니다. 파문 있었던 그 때나 지금이나 ‘핵에 관한 기초연구를 해야 한다’는 나의 학자적인 양심의 소리는 똑 같습니다. 이제는 국제적 동의를 얻어 낼 때도 되었습니다.

Q. 심각한 얘기는 이쯤에서 피하시구요. 다른 에피소드나 들려주세요.

A. 93년 가을인데, 항공우주연구소 유장수 박사가 만든 국산 로켓을 서해안 군사실험장에서 대외비로 발사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만약 성공하면 보도하도록 기획홍보를 준비시켰지요. 그런데 그 게 성공해서 자그마치 150㎞나 날아 간 겁니다.

그 일이 있었던 얼마 후, 북한이 1천㎞짜리 대포동 미사일을 쐈어요. 우리의 코를 나작하게 하려고 과시한 것이었겠죠. 이 시험발사는 미국과 일본이 놀라서 북한을 더욱 감시하게 하는 쾌거가 되었지만, 더 기쁜 일은 대통령이 우리 기술개발을 흡족해 하셨고, 내가 항공우주(연)에 로켓뿐만 아니라 인공위성까지 개발하도록 특별 연구비를 배려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아마도 내년 봄이면 우리 손으로 만든 로켓에 우리 손으로 만든 인공위성을 싣고 남해안에 건설 중인 나로 우주기지에서 우리 기술로 쏘아 올린다고 합니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일겁니다.
지난 2003년에 이어도에 건설된 다목적 해양과학기지도 내가 재임 중에 추진한 거예요. 해양연구소 업무보고 때 건의 하더군요. 그래서 국제해양법 학자인 고려대 박춘호 교수의 자문을 받아서 건설에 나섰지요. 퇴임 후인데도 준공식에 나를 불러줘서 참석 했었습니다.

Q. 오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A. 젊은이들은 시대와 환경이 어찌 되었던 간에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 합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대나 환경을 냉소하거나 자기비하 함으로써 의욕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자신과 나라의 발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정진익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 객원교수 gnik@korea.ac.kr

글쓴이는 성균관대 졸업 후 합동, 연합통신기자로 일하다가 과학기술처 이사관으로 대변인을 지냈으며 지금은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 이글은 월간 과학과 기술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