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세라믹,그리고 Ferrite

[사이언스타임즈] 다윈 탄생 200주년 기념 특집 1

FERRIMAN 2009. 3. 6. 22:16

“인간과 동물은 같은 운명, 앞으로도…” research*eu 다윈 특집, “인간과 동물, 어떻게 볼 것인가?” ① 2009년 03월 06일(금)
유럽연합의 과학문화학술지 리서치 이유(research*eu)는 최근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Humanity, animinity’ 특집을 통해 진화론을 조화의 이론으로 재조명했다. 또한 진화론에 매달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에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진화는 생명체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이다. ‘PUR-유럽’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내용을 정리해서 싣는다. PUR은 public understanding of research의 약자로 과학의 대중화라는 의미다. [편집자 註]

▲ 다윈은 당시 유행했던 노예제를 혐오했다. 그는 노예도 보통 인간과 같다는 평등의 개념에서 진화론을 쓰게 됐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PUR-유럽 유럽의 과학문화와 대중화, 그리고 과학과 과학자의 윤리와 도덕에 앞장서고 있는 ‘리서치 이유’의 편집장 마이클 클래슨(Michel Claessens)은 “인간과 동물을 확연히 구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평범하면서도 쾨쾨한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진다.

또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과연 지구상에서 가장 고등동물인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자연과 환경, 그리고 무수한 생물체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오만한 인간의 권한은 오히려 지구를 파괴하는 스스로 자멸로 이끄는 오만이 아닐까? 그 오만한 자존심의 결과는 서서히 나타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북극에서 전해오는 소식만이 아니다. 남극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윈 탄생 200주년. 우리는 그의 진화론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창조론과 진화론의 결투를 다시 해야 하는 걸까?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등 숱한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창조론의 가면을 쓴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다시 들먹여야 하는 걸까? 자만의 본성이 노출돼야만 할까?

아니다.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성을 회복하는 르네상스를 실천해야 한다. 21세기의 르네상스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함께하는 새로운 화합의 시대를 약속해야 한다. 간단한 이치다.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강자만이 살아남는 지배의 논리가 아니다. 모든 것이 관계와 인연 속에서 공존한다는 상생의 과학이자 철학이다. 그리고 도도한 역사의 논리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라며 코웃음을 칠 그런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양이 앞에서 알몸 부끄러워 할 필요 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개인적으로 체험했던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후 동물을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명문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현상학(現象學)을 배운 후 구조주의 방법을 철학에 도입한 학자로 높이 평가 받는 학자다.

목욕을 한 후 알몸으로 나와 고양이를 마주쳤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하찮은 미물(微物)이라고 생각했던 고양이가 알몸인 데리다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다. 평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고양이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자 데리다는 갑자기 알몸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변(思辨)을 좋아하는 철학자는 이런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끄러운 것이고, 누구에게 부끄러운 것인가? 나는 왜 미물인 고양이 앞에서 부끄러워야 하는가?”

▲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를 각기 다른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으로 보는 이론이다. 동물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운명을 같이 했고 앞으로 같이해야 할 공존과 상생의 대상이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고양이가 알몸인 나를 바라보면서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다. 고양이라면 알몸(nudity)에 대해 전혀 감각이 없다고 배웠다. 그런데 내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과연 고양이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또 생각했다. “나는 고양이 앞에서 왜 수줍어하는 걸까? 인간인 나는 누구일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인간이 나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을 고양이한테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닐까? 동료들은 전부 인간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

데리다의 이러한 질문은 이상하고 황당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은 자신(我)과 남(他)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철학적인 의문이다. 꼭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그저 만만하게 지나쳐버릴 그런 질문은 아니다.

“나의 존재는 타인의 존재 때문”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고 타인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타인은 무엇인가? 세상은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가? 내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를 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타인들 때문이 아닌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타인이 있어야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이 있어야 존재의 명분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휴머니티(humanity)가 존재하려면 애니미니티(animinity)가 있어야 한다.

▲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됐다는 주장은 진화론의 파편에 불과하다. 진화론을 배격하는 것은 인간의 독선과 오만이라는 지적이 많다. 
동물에게도 문화가 있고, 또한 이성과 본능이 있다. 진화론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동물과 모든 생명체는 서로 간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와 인연으로 얽혀져 있다. 인간이 영속적인 삶을 위한다면 단절의 세계에서 살아서는 결코 안 된다. 유기적인 화합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의 고유한 특질이 있다. 서방세계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유럽에서 추진되고 있는 과학프로젝트(scientific project)를 보면 ‘인간의 특질(human specificity)’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

고생물학자(paleontologist)나 품성학자(品性學者, ethologist, 생물의 본능이나 습성, 그리고 그 외에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행동과 외부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인원과 비유인원과의 관계를 허물려고 한다.

심지어 인간에게만 고유한 ‘지능, 언어, 자아인식(自我認識, self-awareness)’을 비하하는가 하면 동물과 비교하면서 ‘사회적 관계, 개인성’ 그리고 인간의 ‘권리’마저도 부정하려는 연구 프로젝트가 많다. 또 유전학자들은 DNA 암호 분석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이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진화론의 교훈, “인간과 동물은 같은 운명의 동반자”

어쨌든 이제 인간인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운명을 같이 해 왔고 앞으로도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때다.

우리는 이제 과거로 돌아가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인간 역시 동물과 함께했던 원시시대를 기억해야 한다. 원시시대를 회상하는 일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이 함께 번성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게 해준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 간의 장벽을 깨는 일이 필요하다.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그 벽을 허무는 일이다. 벽을 허물어야 미래가 있다.

멸종되는 동물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생물다양성이 위협을 받는다면 인간 역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윈의 교훈은 평등이다. 그리고 상생과 공존이며 화합이다. 그것이 바로 다윈의 걸작이자 ‘땅의 혁명’인 진화론의 교훈이다. (계속)

김형근 편집위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09.03.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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